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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n 19. 2023

음악의 실수, 인생의 화음

나는 아직 스케일 공부와 연습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피아노 건반에서 코드를 옮겨다닐 때 손가락이 즉시 안착을 못한다. 약간 딜레이가 생긴다. 그러다가 실수로 옆건반을 치게 되면 어쩌다가 '어! 이게 더 느낌이 좋은데?' 할 때가 있다. 잘못 친 건반의 화음이 더 좋게 들리는 것이다.


코드 진행과 보이싱을 공부하다 보면 결국 대부분 인접음 - 장 2도(피아노 흰건반 하나의 거리)나 단 2도(반음, 검은 건반과 흰건반의 거리), 혹은 3도에서 코드 구성음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코드 네임은 매우 복잡한 것 같은데 음자리를 겨우 찾아 막상 짚어보고, 구성음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쪼개다 보면 다음에 연결되는 코드가 결국 '어! 바로 옆 건반이네!' 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진행에서 약간 세련된 느낌을 주려 할 때도 1, 3, 5도로 구성된 코드에다가 2, 4, 6, 7도를 넣어주면 된다. 사이에 있는 음들 말이다. 이건 예를 들어 '도미솔'과 '도레솔', '도파솔'을 쳐 보고 느낌을 음미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음들의 모임에다가 이름을 붙이면 add2니, sus4니 해서 괜히 어렵게 생각되는 것이다.


C코드 '도미솔'의 인근음 이동을 경우의 수로 따져보면


1. 도미솔을 이동 없이 원본 그대로 - (C)

2. 도를 고정하고 미, 솔을 흰 건반 하나(단, 장 2도)씩 상행 - 도파라(F, 4도)

3. 도를 고정하고 미, 솔을 흰 건반 하나(장 2도)씩 하행 - 도레파(Dm7, 2도 세븐스)

4. 도, 미를 고정하고 솔을 흰 건반 하나(장 2도) 상행 - 도미라(Am, 6도)

5. 도, 미를 고정하고 솔을 흰 건반 하나(장 2도) 하행 - 도미파(FM7, 4도 메이저 세븐스)


6. 도를 단 2도 하행하고 미, 솔을 고정 - 시미솔(Em)

7. 도를 단 2도 하행하고 미, 솔도 같이 하행 - 시레파(G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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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매우 많은 경우의 수와 재미있는 코드들이 출현한다. (괄호 안의 코드들은 물론 빠진 구성음이 있지만, 그 부분은 왼손이나 멜로디에서 해결해 주면 된다.) 어쩌면 피아노 연주자가 실수로 이 음, 저 음 쳐보다가 '어! 이렇게 같이 치니까 어울리네. 멋지네' 해서 화음이 탄생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위 예시로 진행을 해보았다. 3번 다음에 회귀 개념으로 1번을 넣어주고, 5번은 직접적으로 반음이 충돌하므로(미와 파) 빼 준다. 7번 뒤에도 마무리 개념으로 1번을 넣어준다. 그러면 코드 진행 순서가 1-2-3-1-4-6-7-1 이 된다. 이 코드 진행을 A라고 부르겠다. 이것을 녹음해 보았다.  


1. A를 화음(세로쌓기)으로 연주

1. A를 화음(세로쌓기)으로 연주


2. A를 아르페지오(가로로 펼치기)로 연주 

2. A를 아르페지오(가로로 펼치기)로 연주


3. 1과 2를 동시에 연주 

3. 1과 2를 동시에 연주


4.  2에서 구성음을 빼주기(생략)도 하고, 더해주기(반복)도 함. 

4.  2에서 구성음을 빼주기(생략)도 하고, 더해주기(반복)도 함.


5.  1과 4를 동시에 연주  

5.  1과 4를 동시에 연주


들어보면 그럴듯하게 음악 같다. 4번을 행했더니, 5번에서는 이전보다 음악이 세련되어졌다.


내가 굳이 이걸 영상으로 다 찍은 이유는 나처럼 음악 이론이 어렵다고 여기는 초보 분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음악이 먼저 있고 난 후에 이론이 정립된 것이지, 이론 후에 음악이 발생한 게 아니다. 의사소통이 먼저 있었고, 더 세밀한 의사소통에 대한 필요에 의해 언어가 생겨난 것과 같은 이치다. 음악도 결국 하나의 언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좀 더 길게 보고, 여유를 가지고 음악을 배울 수 있다. 외국어로 시를 쓰는 데는 외국어 공부도 필요하지만 역시 시이기 때문에 감성이 앞서 필요하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감성을, 감정을 좀 더 섬세히 표현하기 위해서 음악 이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화음이란 개념이 있는 음악의 세계는 삶과 닮았다. 삶 역시 인접한 음(사람, 재능, 환경)으로 화음(조화, 성과, 관계)을 이뤄내는 것이다. 너무 가깝거나(반음) 멀리 있는 것에서 욕심을 내면 불협이 생긴다. 어쨌든 삶은 내가 가진 것, 현재 할 수 있는 일, 인접한 요소에서 화음을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음악은 실수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잘못 누른 건반에서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오고, 박자를 잘못 맞춘 엇박에서 묘한 리듬이 생겨서 다음 연주에서는 일부러 그렇게 쳐봤을 것이다.




삶에서도 우연과 실수와 사소함이 재미와 인연과 성과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잘 치지 못해도 그냥 피아노를 계속 치듯이, 삶을 충실히 계속 살아나가면 된다. 그러면 우연의 선물 - 아름다운 화음과 몸이 들썩거리는 리듬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은 - 을 받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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