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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ug 05. 2023

성실한 사람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방이 어질러져 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너무 지저분하다'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면 짜증이 난다. 방을 불태워 버릴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비록 지저분하지만 방이 있다'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한 마음으로 방을 치우기 시작한다. 방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사는 수많은 인류가 있다. 비교적 부유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프라이버시가 거의 보장되는 방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잃고 나면 '방'이 큰 행복이었음을 깨닫겠지만, 잃기 전에 일상 속에서 방을 치우고 사는 것을 우리는 '지혜'라 부른다. 그 '지혜'의 다른 이름은 '성실'이다.


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예습·복습을 한다는 전교 1등, 영화 '록키'를 반복해 보면서 언제나 자신을 리마인드하다는 전교 2등이 있었다. 나도 딱 두 달, 죽어라 공부해서 전교 6등까지 해봤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성실함'에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들을 지독한 독종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사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는 내가 모르는, 매일매일의 루틴에서 오는 어떤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느끼는 쾌감 비슷한...


TV에 나오는, 퇴직 후 귀촌하여 근사한 집을 짓고 사는 고상한 노부부가 부러웠다. 그 노부부의 편안한 노후도 '성실'로 점철된 긴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성실'에 쓴맛만 있는 건 아닐 터이다. 극단적인 절대쾌락, 절대불변행복이 지상에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님을 또한 깨닫게 된다. 지금의 배우자 말고 다른 누군가, 멋져 보이는 다른 사람의 배우자 혹은 솔로와 결혼했다면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인 삶을 이룰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속언이 있지 않나. 나의 배려와 사랑 없이 평생 동안 일방적으로 나만 사랑해 줄 사람, 그런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성 간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비정상이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행위를 '지겨움'의 관점에서만 보면 삶은 지루해진다. '반복' 안에서 지겨움이나 지루함이 아니라 새로움을 찾아내고 누릴 줄 아는 지혜, 이것이 '억지 성실' 말고, '진짜 성실'을 가진 사람들의 지혜가 아닐까?


누군가의 시선. 남자는 이래야 하니까, 여자는 이래야 하니까, 가장이니까, 엄마니까 해야 하는 그런 성실 말고 완전히 자의적이고, 적극적인 성실. 그 성실의 당위성을 자각하고 인정한 사람은 삶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살지 않고 즐겁게 애쓰는 자원봉사자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무한히 반복되는 루프(loop), 프로그래밍을 잘못하면 무한루프에 빠지고, 무한루프는 서버에 상당한 과부하를 줘서 결국 하드웨어를 다운시킨다. 하루라도 빨리 뻔하디 뻔한, 비루한, 지루한 삶의 루프를 벗어나고 싶은가? 빚에서 탈출하고, 직장에서 해방되고, 돈에서 자유롭고... 그렇다면 결국 필요한 건 대박??? 복권???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루프의 코딩을 잘못하게 되면 벗어나고자 하는 그 루프는 끝 모르게 이어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무리를 줘서 결국 우리를 쓰러뜨린다.


자발적 성실이란 무엇일까?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조금씩 발전하는 성실. 성실에는 당연히 쓴맛이 있으나 단맛도 있다. 단맛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쓴맛과 함께라서 더 단맛을 즐길 줄 아는 고수, 그 사람이 성실자 아닐까.


어떤 행위에 성실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성실'의 마음을 갖자. 내 삶이 시시껄렁한 나부랭이 인생이 아님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믿자. 마음속의 진짜 나에게 진정 성실하기로 했다면, 그렇게 깊이 심지를 심었다면 이젠 성실한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단계다.


성실을 실천하는 것는 지속의 가치를 믿는 행위다. 우주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소멸하기 전까지 지속한다. 지속은 반복과 동의어가 아니라 반복을 포함하는 의미다. 지속은 반복과 새로움, 성장을 포함한다. 반복에 의미를 더할 줄 모르면 반복은 무료함이 된다. 반복은 사실 엄밀한 의미로 '반복'이 아니다. 어제 본 남편을 오늘 봤다면 그것은 어제의 남편이 반복된 것인가?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숨을 쉬고 있는 현재의 남편, 리얼 남편을 오늘 만난 것이다. 오로지 오늘, 이 순간만 만날 수 있는 실존의 존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보는 남편처럼, 그런 반복으로 하루하루가 어어진다고 내 삶이 무료한 반복의 삶일까. 아니다. 신이 허락한, 심장이 요동치는 매일 새로운 하루다. 우리가 그걸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뻔하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건 없다. '안다'는 자만(自慢)이 가장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진정한 '성실'을 체험하고 체득한 사람은 반복이 사실은 반복이 아님을 깨달은 선구자들이 아닐까.




나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추측하면서.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새로운 살아냄을 자발적으로 체험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것은 '반복'이 아닙니다. '갱신'이나 '갱생'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완전히 새로운 현재 시제의 현실입니다. 성실의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은 과연 그 세계의 매력이 무한함을 깨달은 게 아닐까요. 적어도 유한한 삶의 범위 안에서는 말이지요. 성실히 독서를 하는 사람은 책 속의 세계가 무한함을 믿고, 성실히 음악하는 사람은 음악의 매력을 무한히 즐길 줄 알고요. 성실히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 기부하는 사람, 환경운동하는 사람,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 성실은 결국 내가 성실하고자 하는 그 세계를 통해 인간을 보고, 우주를 보고, 신을 보고자 하는 차원 높은 욕망입니다.


'나는 나에게 성실하고, 나의 삶을 성실히 살겠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혼잣말로 되뇌어 보십시오. 이제 당신과 나의 진정으로 성실한 삶이 시작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흥미진진하게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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