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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07. 2020

50 평생 꾸준히 한 일이 없다

feat. 딱 맞는 말이네

어느 날 절친이 통화 중에 전화기 너머로 이런 말을 했다. "너는 꾸준히 한 일이 없잖아!" 절친이 말하는 팩트 앞에 할 말이 없었다.


꾸준히 뭔가를 하면 일단 주변의 인정을 받는다. 열매를 맺으면 그 꾸준함은 당연히 더 각광받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그러한 끈기를 인정받는다. 꾸준함은 스스로가 느끼는 정체성과 자존감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마치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모습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고, 특출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직업을 전전긍긍했다.  그래서인지 대기업 직원, 공무원뿐만 아니라 생산직 근로자, 구두 닦는 일 등 직종에 상관없이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 하신 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나도 29세 때부터 컴퓨터 가게를 13년 동안 했고, 그 이후로도 주로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긴 했지만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걸 꾸준히 했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다. 외형만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이른바 누워서 침 뱉기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가게는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아도 딱 밥 먹고 살 정도로 굴러갔다. 나는 민물낚시에 빠져서 마음이 늘 거기에 가있던 시기도 있었고, 폐업을 앞둔 몇 년 동안은 돈 벌러 오라는 고객 전화도 제법 거절을 많이 했었다. 뮤직 카페를 오픈하느라 마음이 온통 거기에 가 있었기 때문에 몇 푼 못 버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건 외형일 뿐,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던 그 일을 천직 혹은 내 정체성을 설명해 줄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늘 더 차원이 높은 일을 하고 싶었고,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현실에 억눌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감은 혼자만의 생각일 뿐 내 능력을 증명할 아무런 학위도, 자격증도, 입소문을 탄 기술도 없는 마당에 할 수 있는 차원이 높은 일이란 건 없었다. 거기다가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나이 50을 바라보니 이제는 좀 정체성을 찾고 싶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정리할 사람은 정리할 나이가 됐듯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놓아줘야 할 나이다. 젊었을 때 그러지 못한 이유는 나를 이것도 잘할 수 있고, 저것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열심히 발로 뛰고 관련 서적 열심히 보면 사업도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요리도 잘하니 먹는장사에도 자신이 있고, 컴퓨터를 잘 다루니 인터넷 사업도 어렵지 않아 보이고, 공부 좀 하면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경매니 하는 것들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오로지 자신감만 충만했던 젊은 날이었다.


스마트폰 때문에(나의 부족한 영업력 때문에) 컴퓨터 가게가 쪼그라들고, 뮤직 카페가 동업자와의 불화로 초반에 문을 닫고, 푸트 트럭을 또 다른 이유로 접고,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하면서 보낸 것은 세월이요, 까먹은 것은 원래부터 많지도 않았던 돈이었다.


노래를 만든 지 2년이 다 돼 간다. 작곡이 내게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마지막 끄나풀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여기저기 기웃기웃하고 싶지 않다. 탁월하지 않은 내 능력도 이미 많이 알게 됐고, 욕심도 많이 버렸다. 한 가지만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단지 부지런히 노래 만들고, 노래 부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 안에서, 그런 과정에서 소소한 행복들이 자연 발생하리라 믿는다. 지난 1년 9개월 동안 그래 왔고, 지금도 역시 현재 진행형이니까.


아직 '50 평생 꾸준히 한 일이 없다'라는 제목만 적힌 브런치 화면을 보고 아내가 유쾌하게 웃는다. "딱 맞는 말이네"




죽은 후에는 '이 사람은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음악을 만들며 노래를 부르는 일을 친구 삼아 살다가 갔습니다.'라는 문장 앞에서 "딱 맞는 말이네" 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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