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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16. 2020

자책은 어디로 향하는가?

좋은 자책, 좋지 않은 자책

자책 :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자신을 책망함


'한 3년만 집중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곡을 잘 만들 수 있을 텐데...' 아직 데뷔를 못한 작곡가인 나에게는 십 원짜리 하나도 투자하는 사람이 없다. 나 스스로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곡을 시작하기 직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5000만 원을 깨 먹었기 때문에 원래 잔고가 없던 텅장이 텅텅장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넋두리를 친구들 사이에서 하면 나와는 거의 상반된 지점에 있는 한 친구 - 사업으로 성공했고, 일이 힘들지만 그 사업체 유지를 위해서 버티고 있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남자의 당연한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 는 "니가 그런 꿈이 있었다면 꿈을 위해 미리 준비를 했었어야지. 준비를 안 했으니 지금의 현실도 당연히 니 책임이다"라고 말한다. 굳이 이 친구의 말이 아니라도 '지금의 내 모습은 과거의 내 삶이 반영된 결과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할 말이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흔히들 "그러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하는 말들을 하곤 한다. 나도 학교를 중퇴한 것, 한 직장에 꾸준히 다니지 못한 것, 작은 사업(가게)들의 연이은 실패, 돈 개념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자책을 많이 했다. 내가 다분히 충동적이고, 끈기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 그 결과로 나는 현재 낮은 사회적 지위와 가난 속에서 산다고 말이다. 이런 자책은 지금도 종종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끈기가 없고, 충동적이고, 돈 버는 데 실패한 것이 그렇게 나를 책할 일인가?' 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듯이 나는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집과 차과 재산과 외모로 평가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들 성공하고 싶지 않으랴. 이런 과거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책보다는 인정하고 털어버리는 것이 더 현명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성공하기 전에는 혹은 실패했기 때문에 찌그러져 있다가, 성공한 후에야 활짝 웃으며 큰소리치고, 긍정을 이야기하고, 고진감래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성공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일까.


좋지 않은 자책은 자책이 정죄(죄를 정함)로 이어져 주눅이 들고, 의기소침해지며, 결국 자포자기 혹은 절망에 이르는 경우이다. 반대로 좋은 자책은 반성으로 이어져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경우이다.


실패에 대해서 좋지 않은 자책을 하지 말아야겠다. 오늘 하루에 충실했다면, 단순히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더 단순한 진리로 보인다.


진정 자책을 한 후 반성해야 하는 경우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경우이다. 나는 부모, 형제, 아내, 자식에게 제법 상처를 주고 살아온 것 같다.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보복이었으리라. 그러나 상처는 치유해야 하는 것이지 보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데 그 단순한 진리를 왜 몰랐을까? 아마 분노에 사로잡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상대방 상처 낸다고 해서 내 상처가 치유되진 않는다. 상처 치유는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한 내밀한 문제다.


나는 두 번의 고교 중퇴에 대해 브런치를 통해 커밍아웃했다. 이처럼 가난도, 실패도 인정하고 편안해지고 싶다. 부자가 될 때까지, 성공할 때까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기를 쓰고, 용을 쓰던 과거의 행태를 그만 하고 싶다.


다만 타인에게 상처를 준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하려 한다. 내 상처는 내 내면에서 스스로 치유하고, 역시나 상처투성이인 내 가족과 친구와 좋은 사람들을 조금씩 품어보려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라. 누구의 엄마가 꼭 누군가의 엄마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김복래 여사가 영희의 엄마라 해도, 그녀는 김복래 여사 자신으로서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실패 그 자체이다. 실패는 인생의 한 시기요 시간이며, 삶 그 자체다.


나를 존중하는 것은 내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내 삶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안한 부자나 조급한 거지보다는 (마음이) 편안한 거지로 살겠다 한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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