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곤 합니다.
철없던 시절의 방황을 후회하다 보면 효자효녀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그 옆을 묵묵하게 지켜주신 부모님께 이제라도 잘해야겠노라 다짐도 하게 되구요. 당연하게 받기만 할 때는 몰랐던 사랑에 눈가가 촉촉하게 적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편적인 감정을 가져야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런데 이것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나를 맞닥뜨리게 되었어요. 너무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스스로 인정해주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열 달을 뱃속에 품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온 그날. 내 팔뚝보다 더 작은 아이를 건네받고 품에 안았던 그 첫 순간을 기억합니다. 아이는 사랑 그 자체였어요.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이다. 지켜주고 싶다.
그러다가 궁금해졌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부모님도 이런 기분이 드셨을까?
그런데 왜 나는 사랑받은 기억이 나지 않을까?
우리 엄마, 아빠는 왜 그러셨을까?"
엄마가 되는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물음표가 해소되지 못하고 뾰족한 못이 되어서 마음을 병들게 하고, 일상을 시들어 가게 했어요.
그렇게 엄마가 된 뒤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태반도 깨끗하게 떨어졌고, 임신 전에 있던 혹도 없어졌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산모님
6시간 진통 끝에 아이를 낳은 다음날, 태반이 잘 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초음파를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까만 화면을 한가득 채우며 쿵쿵쿵 심장 뛰던 아이가 없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가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걸 보고 왔는데도 왠지 모르게 아쉽고 공허했다. 예정일에 맞춰서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가 반갑고 기특한 마음보다, 이제 내 안에 아무도 없다는 허전함과 서운한 마음이 더 컸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고 낯선 감정.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산후조리원 생활에 적응해갔다.
아이를 낳고 다음 날부터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따뜻한 산후조리원 바닥의 온기가 올라오는데도 나는 너무 추웠다. 덜덜덜 떨면서 웅크리며 자고 일어나 등이 결리고 아팠다.
모유양은 많은데, 유선이 뚫리지 않아서 젖몸살이 온 것이다. 새 것으로 덧댄 수유패드를 금방 적실 정도로 모유는 뚝뚝 떨어졌고, 가슴은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무거워졌다. 유두에 닿는 옷 안감 실오라기의 촉감에도 소름이 끼쳤다. 가슴 마사지로 풀어내야 하는 그 시간이 고통이었다. 밤마다 양배추를 가슴에 붙이고, 덜덜덜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잤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슬링에 넣어 항상 안고 있었고, 제대로 된 반찬 없이 미역국에 만 밥을 후루루룩 마시듯 먹었다. 무엇보다 집에 아이와 나 둘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외로웠다.
낯선 타지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남편뿐이었는데 남편은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되면 집에 들어왔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밤이 될 때까지 아이와 나 단 둘이 있는 집이 감옥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병원에 왔던 엄마. 조리원 1주일 있다가 집에 오면 엄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겠노라 약속하셨다. 집에 오자마자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된 뒤 나의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
11살, 오빠와 나를 두고 집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그때보다 더 간절하게 엄마를 기다렸고 엄마의 도움이 간절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2일 뒤에 가겠다. 3일 뒤에 가겠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았을 텐데 미련하게 엄마의 약속 하나만 믿으면서 그 시간이 버텨냈다. 2일 뒤에 다시 오겠다던 엄마는 6개월이 지나고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산후조리를 친정엄마가 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냥 할 수 없다고 얘기하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삐죽삐죽 서운함과 미움으로 바뀌면서..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상자가 열려 버렸다.
# 사춘기 없이 자란 아이
사춘기란 청소년들이 아동기를 벗어나면서 겪는 큰 변화의 시기이다.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성적 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 및 사회와 거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사춘기 없이 자랐다.
사춘기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아빠와 헤어지고 낯선 타지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매일 밤늦게까지 식당일에 손 마를 날이 없어서 퉁퉁 붓고 거칠어진 엄마의 손발.. 나까지 엄마를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사춘기도 없이 순하게 자란 아이, 착한 아이. 효녀 OO이. 동네 아줌마들의 이런 칭찬이 나를 더 죄여 왔다. 그 틀에 꽉 끼인 채 그렇게 살아야만 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나이 32살, 엄마가 되고 나서 사춘기 질풍노도와 부모님에 대한 거친 반항 심리가 나타났다.
어린아이가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부모님의 부재와 그 속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원망의 감정들은 해소되지 못하고 엄마가 되어 폭발했다. 엄마가 되는 날, 나의 팔뚝보다 작은 그 아이를 보며 어린 시절 나를 보았다.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 보니 가슴 벅찬 사랑과 함께 책임감이 느껴졌다. 우리 가족에게 온 소중한 아이, 내가 지켜줄게!!
아이는 그 자체로 사랑인데.. 나는 왜 그렇게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무단히도 애쓰며 살았던가?
어린 시절 나는 "나라도 잘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슬픈 표정의 엄마를 웃게 하고 싶었다. 동시에 모두가 비난하고 질책했던 아빠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야!!" "엄마가, 아빠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애써 밝은 면을 생각하고 그 상황에 적응하면서 무던히도 애쓴 기억뿐이다. 내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야 반토막난 우리 가족이.. 언젠가는 다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실선 같은 희망을 붙잡고 발버둥 치며 살았던 거 같다. 그 몫은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어른 아이로 커야 했던 아이
괜찮지 않았는데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노력했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마주한 그 시절 슬픔, 서운함, 원망, 분노의 감정들은 너무 커져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의 원초적인 질문부터,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감정의 찌꺼기들까지 모든 것이 뒤섞여서 혼돈과 절규의 나날이었다.
빠르게 불어오는 바람과 미친 듯이 닥쳐오는 그 파도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그렇게 엄마가 되고 시기를 놓친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 내 기억이 단편적으로 잘리고 왜곡되어 어린 시절 내가 힘들었고 상처였던 기억들만 더 크게 와 닿았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엄마가 된 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산후우울증의 영향인지, 오빠의 암 진단과 투병으로 심리적으로 더 힘든 시기여서 인지, 그 모든 것이 다 합쳐서 저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깊은 나락으로만 빠져갔다.
차라리 어린 시절에 터뜨렸으면 좋았을 감정들.
다 큰 성인이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 원망, 슬픔의 감정들을 표출해 낸다는 것이.. 공감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감정을 드는 내가 혐오스러웠고, 왠지 죄책감이 들었고 외면하고 싶었다.
이런 감정에 괴로워하는 나를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은 정상인데 나 혼자 비정상인 거 같았다. 이 세상에 혼자인 기분. 그것이 그때의 나를 더 비참하고 힘들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