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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송 Dec 01. 2020

(2)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다

인생이 추운 날.


# 가을에서 겨울


2014년 10월,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이와 한 몸이 되었다. 아이는 분유를 거부하고 오로지 모유만 먹었다.

등 센서가 있는지 바닥에 내려두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가슴 위에 올려서 재웠야만 했다.

100일 지나면 통잠을 잔다더라는 육아서와 주변의 경험담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왜 우리 아이는 잠을 안 자지?"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이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나를 눌렀다.


아이는 꺼억꺽 넘어가며 목에서 쉰소리가 날 때까지 울어댔다.

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한 채 함께 울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엄마,

엄마가 저렇게 키우니까 아이가 운다."



가까운 지인들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꽃혀 들었다. 안 그래도 질풍노도 사춘기를 홀로 겪고 있었던 나에게 그 말들은 한 방울 남아있던 자존감도 흡수해버리고 말았다.

한 겨울 말라가는 풀때기처럼 나는 시들어 가고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아이를 업고 육아서를 읽었고, 육아지원센터나 건강가정지원센터 홈페이지를 수시로 확인하며 부모교육이 있으면 꼭 신청해서 들었다.


아이는  잘 크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엄마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 같다.

  "괜찮다는 말"


나와 닮은 내 아이가 나처럼 클까 봐 두려웠고, 나 같은 엄마에게 온 아이가 가여웠다.

남편은 아침에 동트기 전 출근을 했고 온종일 울어대던 아이가 지쳐서 잠든 밤이 되면 퇴근을 했다. 현실적인 도움은커녕,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내 마음조차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 남자가 집에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아이는 엄마품에 안겨 자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이렇게 잘 자고 잘 크고 있는데,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 남자의 무심한 말을 듣고 입을 닫았다. 마음도 함께 닫혔다.

세상에서 고립된 채 겨울을 보냈다. 봄이 오면 내 마음에도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흔들리는 바람에 하얀색 꽃잎들이 날린다.






# 봄이 왔다


봄이 왔지만 여전히 나는 겨울이었다.

이유식을 시작해야 하는 개월 수가 되었지만, 아이는 이유식도 거부했다. 내가 만든 이유식이 맛이 없어서 뱉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중에 판매하는 이유식을 주문해봤고, 조리원 동기에게 내 아이 몫을 부탁해서 먹여보기도 했다.   


모두 뱉어버리는 아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였던 거 같다.

내 마음이 너무 추웠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았다.


2013년 오빠가 암 진단을 받고, 몇 개월 뒤 나는 첫째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이 기쁘면서도 미안했다.

오빠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힘들어하며 죽음과 직면해 있는데, 나 혼자 행복해도 될까?

설상가상, 첫째 아이가 태어나던 그때쯤 오빠가 복용하던 표적항암제에 내성이 생겼다.

항암치료제를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 경이로운 자연의 순리라면, 죽음 또한 생명의 과정상 자연스러운 사건일 뿐이라 말 이 생각났다.

혹시나 내가 출산한 것이 오빠의 병세가 악화되는데 영향이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 나는 심각했고 무섭고 미안했다.


오빠는 항암치료와 부작용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새언니는 오빠 옆에서 케어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이 아픈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으셨다.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엄마 아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또 나를 괴롭혔다.


아이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나만의 것이었다.

뒤늦게 온 질풍노도에 흔들리는 감정들을 가족 중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의 힘듬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나의 힘든 감정을 오빠일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나조차도 우울하고 무기력한 내 감정을 나의 소심하고 꽁한 성격 탓을 하며 부정하려고 했다.


봄이 오고 꽃이 폈다. 봄바람에 꽃잎들이 흔들린다.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을 때도 내 마음은 추웠다.

봄이 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무너졌다. 봄이 왔지만 나만 아직 겨울이었다.

추운 겨울 골방에 갇혀서 쪼그려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을 보며 설레고 있을 때, 나만 겨울인 거 같아 그것이 더 외롭고 아팠다.



사계절이 4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는 항상 겨울이었다.





2017년 4월, 오빠가 복용하고 있는 임상약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1세대 일반 항암제가 암세포와 함께 정상세포들을 파괴하여 부작용이 많고,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한다. 오빠는 불행 중 다행으로 표적항암제 신약 임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한 달에 천만 원 가까이 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신약을 복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복용하며 지냈던 임상약에 내성이 생겼고, 다음 치료방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첫째 아이와 함께 오빠네 집으로 갔다.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하는 건지.. 두려움과 불안한 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오빠와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었고 예정일이 다가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받은 오빠의 문자.

핸드폰을 붙잡고 울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보낸 오빠의 메시지가 반가우면서도 애달펐다.


둘째는 낳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새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오빠가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왔다는.. 연락을 받고,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4년 동안 치료받았던 그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산소호흡기를 하고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 뒤 병실로 올라가게 되었다. 새언니와 나는 교대로 오빠의 곁을 지켰다.

낮시간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오빠에게 갔다가 오후 4시에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오빠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50일 된 둘째 아이를 안고, 오빠를 생각했다.

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함께 견뎌내야 했던 그때.

그 누군가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나를 더 말라가게 했다.


매서운 바람에 뼛속까지 시렸다.


누구도 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그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웠다.

먼저 간 오빠가 가여웠고, 엄마와 외가 친척들이 미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았다.


잊고 싶어서 매일 밤 술을 마셨다.

휘청휘청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어느 날 밤, 우는 내 품을 파고드는 두 아이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지금 이렇게 술에 취해 잠드는 내 모습이..

내가 그토록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엄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 날 이후 밤마다 마시던 술잔 대신 다시 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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