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면접 보러 온 거 맞는데요..
런던 리젠트 대학교에서의 비즈니스 클래스 커리큘럼이 끝나갈 즈음, 어느 산업의 회사에 인턴을 지원할 지에 대한 선택의 고민이 남겨져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취업을 위해 전공 혹은 하고 싶은 일과 관련된 직종을 고르는 게 통상적이지만, 런던까지 와서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인턴 사무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 박물관을 자주 애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박물관에 가는 것이 싫은 것도 아니었던 나는 박물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사소한 고민을 할 때에는 여러 생각에 잠기지만, 오히려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결정해 왔다.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박물관 지원을 택하게 되었다.
총 세 군데의 박물관에 지원을 했고, 그중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유대인 박물관'이었고 딱히 가릴 것 없던 나는 면접 날짜를 조율하고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영국의 유명한 고급 백화점 해롯백화점이 있는 Knightbrigde역 근처였고 건물의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박물관 관장과 간단한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사소한 질문을 했고 종교가 있는지 물었다. 이전에 미국에서 찬양팀 기타 반주를 맡았던 적이 있던 나는 교회에 다녀본 적은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곳이 유대교 관련 박물관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열려 있으면 했고, 유대교 교인들끼리만의 강한 유대감 속에 잘 묻힐 수 있을지 테스트하는듯했다. 간단한 질의를 끝낸 후 옆 사무실로 이동하여 직원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면접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직원들과 간단한 커피타임을 가지며 이야기했다. 그러던 도중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부부는 나를 아는 듯이 '네가 면접 보러 온 인턴이구나'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포스를 뽐내던 그들에게서 박물관 관장과의 상하관계가 바뀐 듯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재정적인 상황 그리고 어떤 집기를 교체해야 하는지 등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들이 박물관의 재정적 스폰서인 것을 짐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박물관 관장은 나에게 이틀 후에 한번 더 방문하여 인터뷰 볼 것을 요청했다. 합격한 줄 알았지만 한번 더 오라니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었고 나는 알겠다 하며 박물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나는 박물관 건물을 다시 찾았고 들어가려던 찰나 거구의 남자가 박물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게이트키퍼 같던 그는 내가 들어가려는 것을 막아섰고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한낱 너보다 작은 동양인에게 무슨 이렇게 강한 경계심을 보이며 무서운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인턴 면접을 보러 왔다고 설명했고 그는 무전을 통해 나의 일정을 검증하려는 듯했다. 그는 무전을 하는 순간에도 한참 동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며 경계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무언가 무전을 받은 후에야 나는 박물관 1층 대기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박물관 1층과 2층에는 연회장이 있었고 여러 명의 직원이 연회 준비에 한창으로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다. 연회 준비를 구경하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던 도중에 이틀 전에 봤던 부부가 고풍스러운 롱코트와 명찰을 찬 채로 나를 맞이하며 특유의 영국식 발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여기 직원들이 너를 잘 대해주더니?"
나는 게이트키퍼 좀 깐깐한 거 빼고 다 괜찮았다며 농담했고, 사실 별문제 없이 잘 기다렸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부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직원들이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하더냐? 오늘 이곳에서 일어날 일들을.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 총리가 오시거든!"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일로 총리가 이곳에 오시는지 물었다.
"Conservative Party Conference will be held here, today." (이곳에서 보수당 연회가 열리거든)
그날 박물관 연회장에서 비공식 보수당 파티가 개최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모든 상황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파티에 참여하는 듯한 의상을 입은 것, 그들이 파티 초대자로서 명찰을 찬 것, 게이트키퍼가 나를 극도로 경계한 것, 긴장한 듯이 분주하게 준비하던 연회장 직원들의 표정들까지. 나는 부부와의 대화를 마친 후 사무실로 올라가 남은 면접을 보았고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박물관 관장은 나에게 이곳에 영국 총리가 오는 것은 대외비라며 나를 입단속 시켰다. 사실 한 나라의 수장으로 임명되면 총리는 원래 소속이 보수당이었든 민주당이었든 그 사실과 관계없이 중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보수당이 여는 파티에 참석했고 그가 왔기에 이 파티가 치밀한 보안과 기밀을 지켜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면접을 본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총리가 오는 것도 보수당 파티가 열리는 것도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 유대인 박물관에 있는 연회장에서 정치적 연회가 열리는 것인가? 일전에 누군가 내게 썰을 풀듯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대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
훗날 박물관은 영국생활 속 나의 일터이자 쉼터 그리고 아늑한 애정 어린 공간이 되었다.
Photo by B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