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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 bam Jun 05. 2023

인종차별과 함께한 나의 성장기

미국 고등학교 일지

나는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내가 있었던 곳은 캘리포니아 남부 쪽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여행 갈만한 콘텐츠가 하나도 없고 주택만이 난무한 곳이다. 하지만 나는 내 기억 조각들을 하나씩 주으러 그곳을 다시 가고자 한다.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는 과거의 나와 재회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다. 그 기대감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슬픔, 동정심, 안타까움, 아련함, 기쁨, 즐거움, 그리고 대견함까지. 첫 번째로 들어간 홈스테이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인종차별을 받았고, 두 번째 홈스테이에서는 밥을 잘 주지 않아 배고픔을 겪었다. 시련이 가득한 시기에 만난 첫사랑은 위로와 배신을 선사했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경험했다. 하지만 10대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경험들은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중 첫 번째 홈스테이에서 겪은 인종차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차별하기 위해 홈스테이를 운영하는 Racist]

영어가 너무 잘하고 싶었던 어렸을 적 나는 무작정 미국을 보내달라고 떼썼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모든 지원을 해주었고 나는 홀로 미국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모두가 말하는 'American Dream'을 나도 꾸었던 것일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미국에 도착한 후 첫 장면이 있다. 그것은 착륙하는 순간 기장의 한 마디이다.


"Welcome to the city of angel"


천사의 도시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LA는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도시가 아니던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 누구나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 나는 기장의 그 한마디에 앞으로 겪을 내 여정에 대한 꿈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나는 Murrieta라는 내가 거주하게 될 작은 도시로 향했다.


미셸, 사이먼은 백인 부부로 나의 홈스테이 가디언이었다. 그들은 웃으며 나를 반겼고, 자신들을 mom & dad로 불러도 좋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나에게 스테이크 써는 법과 식사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반려견들과 함께 산책하며 즐거운 첫 일주일을 보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알 수 없는 것들로 내 행동을 제지하기 시작했다.


1. 차를 탈 땐, 창문을 열지 마

첫 번째 내게 했던 제지는 자동차 창문을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창문을 열고 차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이 들어오는 게 좋았기 때문에. 사이먼은 내게 창문을 열지 말라고 소리쳤고 그 이유는 바로 창문을 열면 차가 더 흔들리고 그것으로 인해 기름값이 더 나간다는 이유였다.


2. 손을 닦고 나면 그 주변에 튄 물기를 다 제거해

두 번째 내게 했던 제지는 화장실 물기 제거였다. 세수나 이를 닦으면 세면대에 물이 튀기기 마련이다. 그 세면대에 튄 물을 항상 깨끗이 닦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매번 열심히 닦았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집에 있는 반려견과 나는 같이 화장실(변기)을 사용했고 반려견은 내 변기에 오줌을 쌌다. 그럴 때마다 변기에는 오줌의 흔적이 항상 묻어있었고, 나는 매번 변기를 닦고 사용해야만 했다.


3. 10시 취침

한국에서도 나는 그렇게 늦게 취침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11시쯤 되었을까? 열심히 숙제를 하고 있던 중 켜져 있는 내 방 조명에 화난 건지, 항상 10시에 취침을 하라고 소리쳤다. 심지어 그날은 미셸 부부의 딸 대학 배구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산타바바라를 다녀온 날이었다. 하교 후 우리는 바로 산타바바라로 향했고 돌아오고 나니 이미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날 평소와 달리 늦은 시간 숙제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4. 방문은 항상 열어둬

내 방문은 상시 열어두라고 지시했다. No Privacy


5. 라면 끓일 때, 제일 작은 냄비를 사용해

하교 후, 너무 배가 고파서 가끔 라면을 끓였다. 하지만 그것을 본 후, 작은 냄비를 사용하라고 명했다. 그 이유는 큰 냄비를 사용하면 물 끓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끓인 냄비는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기존의 냄비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6. 이상한 노래를 듣지 마

당시 미셸 부부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둘 다 대학교 진학으로 독립을 한 상태였고 그들이 놀러 올 때면 아들이 내게 여러 음악을 추천해주곤 했다. 나는 그 추천 노래를 가끔 틀어놓고 있었고, 미셸부부는 그 노래를 듣고는 내게 질이 좋지 않은 노래를 듣지 말라고 소리쳤다.


사실 이 것 외에도 더 많은 제지 사항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함축하고자 한다. 나는 약 2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쫓겨나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이러한 상황들을 설명하지 않았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내가 자진해서 미국에 오겠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트러블이 생긴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감내하며 지내야겠다고 버티고 있었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집에서 내쫓았다.





 

쫓겨난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아침부터 어두운 기운에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태껏 본 표정 중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학교가 끝난 후 학생들 모두가 라이드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 또한 기다렸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떠났을 즈음에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홈스테이 연결해 준 중개인인 킴벌리가 데리러 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미셸 부부네로 향했다.


미셸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섭게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2개월간 잘못한 점들을 중개인 킴벌리에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닌 것들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이유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까지 들어있었다. 나는 내 감정을 꾹 억누르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NO'라는 강력한 한마디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짐을 싸고 킴벌리의 차를 탔다. 그 차를 타는 순간, 억누르던 모든 감정이 내려앉았고 서글프게 울며 킴벌리에게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 같고 왜 내가 쫓겨나는지 모르겠다며 못하는 영어로 흐느끼며 설명했다.


그녀는 나를 위로해 주며 일단 갈 곳이 없으니, 자신의 집에서 잠시 며칠간 머무르라고 했다. 그 시기는 마침 미국의 명절 Thanksgiving day였고 나는 킴벌리의 집에서 칠면조 파티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남편은 오래된 스포츠카를 가지고 있었고 내게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의 차를 타자마자 미셸부부가 내게 제지해 온 모든 것들이 미국 문화가 아닌 그저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창문 4개를 모두 내리고 컨트리뮤직을 크게 틀며 Freeway를 신나게 달렸다. 차로 들어오던 그 바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바람이었다.


Photo by 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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