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짧은 단문도 어려웠다. 무지한 글공부도 그렇고 얕은 관찰력과 영감은 몇 꼭지 끄적이면 바닥이 드러났다. 연료 계기판 끝을 맹렬히 가리키는 화살표를 살리기 위해 빈 지갑과 돌아갈 거리를 계산하듯 소진된 정신은 안절부절못했다. 밑천이 없으니 퍼 올릴 사유(思惟)가 부재하고, 하릴없이 소설을 읽었다. 사람 이야기가 필요했다.
생각할 능력을 잃은 뇌는 물렁한 스펀지가 됐다.진즉 시작한 노안에 맞춘 다초점 안경으로 책을 보는데 글자가 흔들거린다. 띄어쓰기로 열 맞춘 단어가 엉뚱하게 해체되고 붙더니 넷째 줄에서 시작한 시선은 어느새 일곱째 줄 중간에서 허우적댄다. 할 수 없이 소리 내어 읽는다. 가재도 게 편인가. 가는귀먹기 시작한 귀가 제 입으로 낸 소리엔 얼마나 명명하게 듣는지 모른다. 목소리가 갈라지면 다시 눈으로 읽다가 또 글자의 숲을 헤매면 자를 대고 한글을 처음 익히는 할머니처럼 천천히 읽는다. 젊은 날 속독을 자랑할 때 코 끝에 안경을 걸치고 몇 장을 못 넘겨 책장을 덮는 사람이 의아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모양이다.
해가 어스름해지면 유독 사위가 좁아져 갑갑하다. 백내장 탓이다. 오늘 저녁 동네를 걸으니 가로등과 네온사인, 아파트의 불빛이 포송포송한 눈송이로 퍼져 있다. 어둠에 부딪친 빛이 건물과 전깃줄 위에 붉고 노랗게 깜박이는 게 어릴 적 반짝이를 붙여 만들던 크리스마스 카드의 풍경 같았다. 예뻤다. 차암 예뻤다. 자세히 보이지 않으니 저만치 있는 사람의 무뚝뚝한 표정과 화난 얼굴을 건너뛸 수 있고 버려진 오물의 지저분함을 대충 넘어가니 노안도 좋은 구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었다. 쉽지 않고 재미나 긴장감 있는 사건 하나 없는 건조한 문체는 사람 얘기뿐이다. 주인공은 유약한 지식인, 주변 인물은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이웃으로 흔하디 흔한 마음 이야기이다. 그런데 백 년 전의 그들과 지금의 우리가 어쩌면 변한 게 하나 없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마음은 진화하지 않는다.
읽고 나니 오랜 포만감이 밀려온다. 즉흥적인 에세이라면 백오십 살이 넘은 노인 작가의 넋두리였겠지만 지금 읽은 건 소설, 자그마치 백 년 전의 이야기다. 사람이라서 갖는 감정, 의식, 지성, 믿음, 그중 하나라도 온전하고픈 열망과 좌절이 책 속에 흥건하다. 죄와 무죄의 구분을 헝클어 놓는 본능이란 놈 때문에 우는 인물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제는 시간을 들여 두어 번은 읽어야 책 하나를 완독하고 기억할 수 있지만 몸에 좋은 현미밥을 먹는 기분이다. 꼭꼭 씹어 글자의 단물을 삼키고 필사를 곁들이니 건강해지는 듯해기쁘다. 삶의 지혜는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소소한 순간에 반짝이는 찬란함을 아는데 있다.
새벽에 잠드니 내일 아침은 노곤하고 낮 동안 게으름 피울지 모르겠다. 괜찮다. 살아보니 적당히 사는 일이 허락되는 시기가 온다. 젊을 때는 달리지 않는 시간이 아까워 억척스레 쪼개어살았는데 뛰어가든 걸어가든 최종 목적지에선 눈 어둡고 귀먹은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는 동안 무얼 알았는지 보따리를 풀라 했을 때 자기 삶의 기쁨을 하나라도 찾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우승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