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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Nov 21. 2021

나의 얼굴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이

10월의 어느 밤 느닷없는 가슴 통증이 찾아왔다. 119구급차에 실려 도착한 응급실에서 협심증 진단을 받고서야 나이가 실감 났다. 생애 주기를 숫자로 숭덩 잘라내고 이쯤이 내 상태니 괜찮다며 자가 진단한 일이 생각나 실소가 나왔다.


일찌감치 경고등을 켜준 심장이 고맙다. 허투루 세상만사에 애쓰다 소진되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한 방이다. 놀랬겠다는 지인의 말에 어차피 누구나 죽잖아 했지만 이조차 머리로만 이해했음이다. 예상치 못한 10월의 이벤트 덕에 정지된 사고가 다시 한 뼘 움직였다.




집과 차, 직장 그리고 무탈하게 성장한 자녀가 있다. 취미와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으니 사회적 인간 역할도 나름 괜찮은 셈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열심을 낸 걸음은 삶의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멈췄고, 충분하다고 자족했을 때 해탈은커녕 방향을 잃었다.


쉬지 않고 움직여야 살아지던 때가 있다. 부모나 자녀로서의 의무 외에 목숨이 붙은 한 최선을 다해 살라는 가르침을 지켜야 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목적을 두고 다 이루었다는데, 나는 최소한의 먹고살 수 있음과 이타적 행위 약간으로 숙제를 끝낸 느낌이었다. 더 원하고 가지려는 욕망이 부질없고 이래도 그만하며 애착을 놓는 순간 생의 이정표가 비었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줄지 모른다며 게으름을 피우던 찰나에 심장이 발작했다.



얼굴은 얼골. 얼이 새겨진 골짜기다 - 박노해<걷는 독서>
            

미간에 깊이 패인 세로줄이 오랜 시간 철옹성 같은 고집과 생활의 집착을 드러내듯 굳게 다문 입술 끝에 처진 입꼬리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이런 얼굴은 말줄임표 문장부호다. 제 할 말을 뱉고 나면 나머진 알아서 하라는 방치와 거부감 때문에 다가가기 어렵다.


미소는 얼굴을 느낌표나 물음표로 만든다. 올라간 입꼬리를 따라 볼록해진 볼과 눈매까지 덩달아 씰룩이다 보면 눈에 힘이 들어간다. 깜박이는 눈에 감도는 생동감은 상대에게 질문하고 반응할 때마다 반짝인다.


늙은 얼굴이 눈부신 사람이 있다. 오드리 헵번의 주름진 작은 얼굴은 한물 간 여배우가 아니라 여자라면 꿈꾸는 나이 들어서도 고운 얼굴이다. 노인이 된 그녀를 우린 아름답다고 말한다. 화려함과 굴곡진 시절을 풍미한 그녀는 어떻게 세상의 이목을 받던 자리에서 세상을 주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녀가 크리스마스 날 가족에게 읊조린 시는 그녀가 평소 어떤 사람인지 말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늙지만 더 빨리 노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놓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쥔 손을 가진 사람이 그렇다. 팔짱 낀 모르쇠가 익숙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달려가지 않아 쇠약한 두 발, 미디어 영상을 쫓느라 빨개진 두 눈에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도 그렇다. 


이타주의는 자신을 배려하는 데서 시작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배려한 사람은 세상의 필요한 곳이 어딘지 살펴볼 여유가 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내민 손은 평소 어떻게 살 지 고민한 현자의 것이다. 인품은 세상에 대한 배려가 배인 사람만이 갖으며 자신과 타인을 품은 얼굴은 평화롭고 마음을 쓸수록 빛이 난다.


혼자 놀고먹으며, 신경 쓰이는 일은 거부하는 무탈한 사람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안식으로 알거나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걸 자유라 여기는 사람이 삶의 중간쯤에서 어디에도 남지 않은 흔적 때문에 외롭다고 소리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의문이다. 


나이와 지위, 재력을 가진 사람은 많은데 닮고 싶은 사람은 왜 적을까.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설렘을 느꼈다면 굉장히 귀한 경험이다. 인위적인 치장과 가벼운 생각으로 채워진 기품 없는 얼굴이야말로 속절없는 늙음에 마스크를 가면으로 사용한다. 어른은 나이가 아니라 덕으로 완성된다.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하늘과 세상에 쓰이는 그릇이 되라고 기도하면서 얼굴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다시 심장이 발작했을 때 얼굴에 남은 마지막 흔적이 미소라면 얼마나 위안인가. 최소한 닮고 싶지 않은 얼굴이 되지 않도록 미완성된 얼굴을 또 빚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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