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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Jun 23. 2021

당신 삶의 최대 주주

김영하 작가는  젊은 날, 친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비한 시간을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써야 했다고 말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삶을 지탱하는 최소의 단위가 자신임을 안다. 사람 사이에 어울리려고 힘과 시간을 턱없이 소비한 일부를 자신에게 몰두했다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다 길을 잃는 횟수를 줄였을지 모른다.     



가족은 기초 집단이자 개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어주는 혈맹 단체이다. 생태계에 던져지기 전에 절대적인 보호로 무사히 성체로 키움으로써 사회의 일원을 만든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갈 곳, 보금자리 역할의 가족은 자녀에서 부모로 시간이 지나 위치만 바뀔 뿐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지독한'을 붙일 때 정말이지 죽지 않으면 뗄 수 없는 족쇄가 된다. 부양과 돌봄으로 막막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이 꿈꾸는 게 죽지못해 사는 거라면, '차라리 죽을까' 혼잣말하다 자신을 혐오하는 자기 형벌에 산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결혼'과 동시에 무수한 타인이 불쑥 내 삶을 간섭할 거라는 걸 교육받지 못했다. 당최 업그레이드가 느린 가족 제도는 오직 순종한 이에게만 옳다고 한다.

우리의 가족 관계는 철저히 배타적이다. 핏줄은 여전히 안으로 팔이 굽고 전입한 타인은 이도 저도 아닌 구성원이다. 동시에 개인적이다보니 내부의 골치아픈 문제는 만만한 구성원 한두 명의 희생으로 해결된다. 대한민국 가족은 100년이 넘은 역사동안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내뱉는 한국 기독교 역사처럼 여전히 수구적이다.


당신은 우리의 결혼과 가족 문화를 애끓고 사랑하는가. 참말로 그러한가. 그렇다면 나는 그대가 살아온 역사와 교육에 경외를 표하며, 한편으로 우리 역사에 깊이 남은 좀비 같은 유교의식에 기겁하겠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이타적인 사람조차도 이타적인 행동으로 행복을 찾는다. 누군가의 반려가 되는 건 그의 과거, 현재, 미래와 주변 사람까지 받아들인다는 의미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인생을 점유하려는 강제적 유대 의식에 피곤하다. 반려자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나 자신이 아니다. 내가 한 이만큼은 최대한이고 네가 한 이만큼은 최소한이라는 억지에, 관계에서 이탈하려는 사람이 있다. 무리에서 나오거나 아예 무리에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회는 시대의 변혁이라며 구경꾼 모드지만 일차적 집단의 해체 위기를 방치했으므로 유죄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사람을 품었던 시간을 후회하는 김영하 작가를 보면서  내 인생을 점유하는 가장 큰 소유자가 누군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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