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우와 폭염이 주거니 받거니한 한여름 지하철은 에어컨의 강한 냉기에도 끈적한 살갗 때문에 불쾌했다. 침묵으로 간신히 짜증을 감내하는 사람들 사이를 족히 팔십은 돼 보이는 동정 구걸인이 비집고 다녔다. 생기라곤 없는 피부 껍질엔 긴 주름이 단단히 자리 잡혀 있다. 구부정한 허리춤에 찬 낡은 주머니에서 대충 휘갈겨 쓴 종이가 사람들 무릎 위에 던져졌다. 그저 그래서 바래기까지 한 사연 조각은 기계적인 손놀림과묘하게 어울렸다. 승객들은 종이와 할머니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 푼도 내주지않겠지만 동정 뒤에 숨은 거짓을 눈감아주겠다는 최소한의 예의뿐이다. 대부분 눈을 감거나 핸드폰을 봤고 소리 없는 할머니의 동작만 부산했다.
#2. 중간쯤 지났을까. 한 청년이 일어나더니 종이를 패대기쳤다. 거칠게 내동댕이처지길 바란 청년의 바램과 달리 한없는 가벼움에 속절없이 팔랑거리던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할머니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눈꺼풀이 거의 덮은 짜부라진 눈의 반쪽을 치켜뜨고 종이와 청년을 번갈아 쳐다보던 할머니 입에서 일순간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이런 썅놈의 새끼가 어따가 버리고 지랄이야. 싫으면 그냥 두지. 새파란 좆만 한 새끼가 뭔 지랄이여! "
금방이라도 부축해야 할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 씨발. 그러게 왜 남의 다리에 쓰레기를 올려놓냐고!"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 움큼밖에 되지 않는 몸에서 나온 걸걸한 할머니의 육두문자도 그렇지만 멀쩡한 청년의 입에서 나온 되바라진 반격은, 명색이 동방예의지국인 이 나라에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전철 호객이나 삥에도 노약자니까 눈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뒤집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3. 결국 이긴 자는 할머니였다. 상대의 대꾸와 상관없이 평생 배운 욕을 내뱉을 때마다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악다구니를 담은 소리통이 있나 싶었다. 노여움인지 힘이 달린 건지 부들거리는 몸에서 뿜는 욕설은 오늘이 말을 할 수 있는 최후의 날인 듯 비명에 가까웠다. 부끄러움이나 억울함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듯 최선을 다한 저주였다. 싸움도 주고받아야 맛인데, 제 아무리 앞뒤 없이 돼먹지 못한 청년이라 해도 일방통행하는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청년의 거친 말은 번번이 몰아치는 상대의 고압적인 육성에 묻혔다. 사람들은 저러다 청년이 폭력을 쓰지 싶었다. 다행히 청년의 마지막 발악은 니미와 함께 할머니를 밀치고 다른 칸으로 이동함으로 끝났다. 할머니의 걸쭉한 메아리는 청년의 뒤통수가 사라지고 사연 조각을 수거한 뒤 옆 칸으로 옮겨가 문이 닫힐 때까지 계속됐다.
#4. 모두가 끈적한 오후였다. 생기 없는 피곤함과 무기력에 무표정만 남았다. 조잡한 사연이 청년의 무엇을 건드렸는지, 누런 종이 조각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쓰레기였는지는 모른다. 분노한 청년의 도화선은 발파했고 할머니는 살아온 생애를 드러냈다. 청년을 향한 할머니의 저주는 실상 대상이 없었다. 여름이 잘못이고, 흔들리는 전철이 문제였으며 전철을 탄 자신을 탓했다. 전철 안 사람과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적이었다. 무엇이 할머니의 가슴을 그토록 딱딱하게 만들었을까. 그날 오후 청년의 가슴은 왜 화산이었을까. 애꿎은 두 사람의 육두 향연이 뉴스에 나올 법한 묻지 마 범죄로 번질까 우려한 승객들은 하필 자신이 있는 현장에서 사건이 생기면 난처하고 귀찮아질까 봐 겁낸 건 아닐까.
#5. 오늘 자꾸 사무실 책상의 펜이 바닥을 구르다 떨어져서 언짢았다. 세 번째 떨어졌을 때는 화가 치밀었다. 하필 그 상태로 출장을 나오는데 타려던 전철이 막 지나갔고, 다리 아파 앉으려는 의자는 얼룩져있었다. 연착된 전철을 타다가 내리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더니, 간신히 남은 자리는 어린애를 안은 여자의 몫이었다. 읽으려고 챙긴 책은 막판에 두고 나왔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옆 사람의 끈적한 팔이 부딪치며 찍찍 소리를 냈다. 냉방으로 머리에 한기가 드는데, 땀구멍의 땀은 여전히 끈끈했고 좁은 통로를 웬 할머니가 서슴없이 밀쳤다. 그 덕에 메고 있던 가방이 떨어졌다. 아악 소리 내고 싶은데, 마침 웬 청년이 일어나 할머니가 놓은 종이를 집어던졌다.
#6. 그날, 전철 안에 분노를 품지 않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한 움큼씩 가슴에 시한폭탄을 품은 현대인은 유효기간이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뇌관을 억누르며 산다. 폭염으로 터지지 말고 영원히 불발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일생이 육두문자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2021 여름
#7. 입마개가 당연해졌다. 마스크를 벗음이 유죄이므로 언제든지 쉽게 범법자가 될 수 있다. 쉼 없이 떠드는 인간에게 숨 쉴 권리 외에 말할 자유를 책임지라는 자연의 훈계가 지엄하다. 이번 참에 모두가 휴화산을 지녔으면 좋겠다. 너와 나의 목소리가 아름다웠음을 깨닫고 우리의 말이 여름철 시원한 냉수가 되길 감히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