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80년 고무 대야와 구공탄

by 낭만딴따라

마당 공용 수돗가에선 세수하는 사람과 밥 짓는 사람 간의 흉물 없는 고성과 녹슨 펌프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엉켰다. 시끌벅적한 아침 소동이 끝나면 수돗가 주위에 집주인이 심은 키 작은 채송화가 고개를 든다. 듬성듬성 심긴 샐비어가 익을 때 한두 개씩 뜯어먹는 재미나 사람 없는 수돗가를 차지하고 종내 펌프질 하다 풀벌레를 잡다 보면 어느새 오후의 석양이 가라앉았다.


엄마는 이른 저녁을 준비하는 2호 아줌마나 4호 언니와 얘기하길 좋아했다. 이따금 집주인 아줌마가 마당에 마실 나오면 쌀 씻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 공간은 모두의 다용도실이다. 여름이면 각 집에서 나온 빨간 고무대야가 햇빛에 배를 드러냈다. 바람이 시려지는 때를 맞춰 포대 자루를 깐 바닥 위로 10장, 20장씩 구공탄을 쌓는 행사가 열린다. 손수레 가득 구멍 맞춰 도열한 연탄이 대문 앞에 서면 주인집까지 총 다섯 집이 나와 귀한 손님을 맞느라 부산했다. 늦은 밤 마침내 계단 턱까지 차 오른 연탄 부대는 어린 나조차 설레게 했다.


동네에는 방 하나씩을 나눠 사는 집이 많았다. 벽돌 하나 사이로 옆방의 싸움 소리, 방문한 손님과 경조사까지 비밀이 없었다. 동네 전체가 그렇다 보니 시골 촌락처럼 내 또래의 아이들은 어느 대문 집 아들, 붉은 기와집 손녀, 담배 가게 딸로 불렸다.


새벽에 일터로 나간 가장 다음으로 아침을 정리한 엄마가 채비를 한다. 엄마는 직원 대여섯 명이 일하는 공장에 밥해주러 다녔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없는 대신 공장이나 시장통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와 잡동사니를 파는 리어카 상인에게 세상 소식을 듣던 시절이다. 어느 배우는 바람나서 이혼했고, 누구는 횡재해서 이층 양옥집을 샀다는 말에 동네는 술렁였다. 흉흉한 소문이 도는 날엔 웅크리고 자는 제 자식의 이마를 괜스레 쓸어내리며 가슴을 조이는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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