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행주에 닦인 앉은뱅이 소반의 물기가 채 마르기 전에 공책이 펼쳐진다. 공책의 낱장은 찐득한 물고문을 당하다 기어이 글자 하나가 벗겨져 소반에 낙인찍는다. 상 아래 양반다리가 저려 오므리고 펼 때마다 들썩이는 상의 모양새가 '이게 모야' 울먹이는 형국이다.
고된 숙제 끝, 지우개 똥이 범벅인 상은 밥 익는 냄새를 따라 밥상으로 변한다. 책을 받치던 인텔리전트 상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하다. 생선 대가리나 돼지비계가 지나간 현장은 아무리 닦아도 비릿한 살육이 배어있다. 차라리 낫다. 하필 도덕책 뒷면에, 사회과 부도 넓은 하늘에 점점이 얼룩진 깍두기 국물은 시큼한 하층민의 냄새가 난다.
책과 공책 하나만으로 꽉 찬 소반에서 공부할라치면 방문 너머 주인집 아들의 방이 보인다. 나의 앉은키만 한
매끈한 책상의 다리와 바퀴 달린 의자는 늘 비어있다. 제멋대로 쌓인 책이 떨어졌다가 올라가길 반복하는 주인집의 백수 책상은 감히 강화 유리까지 입었다. 뜨거운 뚝배기에 화상 입고, 지우개 똥 무더기를 받아내는 내 소반과 견줄 수 없다. 살짝 배알이 뒤틀린다. 저 놈의 책상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 영 심사가 꼬인다. 방문을 쾅 닫고 선풍기를 강풍으로 돌린다. 덜덜덜 날개 소리와 투덜거림이 제법 장단 맞다. 밥상에 거침없이 지우개질을 하자 뿌드득 지우개가 아프다며 똥을 싼다.
오늘은 시래기 넣고 비빈 양푼재기 비빔밥이다. 소박한 저녁이 미워 소반 여기저기에 매운 고추장을 남겼다. 언젠간 옻칠 번들번들한 칠개 소반에서 밥 먹을 테다.
어깃장 부리고 잠들던 1990년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