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 엄마인데요. 혹시 누구누구 엄마이신가요?”
순간 직감했다.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에게 걸려온 낯선 여자의 전화는 두 가지다. 싸움 아니면 여자 문제.
목소리의 주인은 아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며칠을 고심했을 만한, 누가 봐도 여자아이임이 확실한 이름을 대며 자신을 그 아이의 엄마라고 했다.
“우리 아이랑 선생님 아들이랑 같은 반 친구예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둘이 사귀는 거 아시죠? 그래서 한 번 좀 뵈었으면 하는데요.”
요즘 시대에 남녀공학인 학교의 공공연한 연애가 별스럽지 않기에 아들의 연애를 대충 눈치챘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반인 두 아이의 연애는 친구들 사이에 금방 소문났다.
아들의 방은 한 달이 멀다 하고 설익은 수컷의 시큼한 비린내가 진동했는데, 여자 친구가 생긴 이후론 한번 욕실에 들어갈 때마다 빨라야 한 시간이다. 아들이 사용하고 난 후의 욕실은 내부에 가득 찬 김을 빼느라 한참을 문을 열고 환풍기를 돌려야 한다. 물 좀 아껴 쓰라는 아빠의 잔소리가 매일이지만, 머리 감기만 두서너 번, 거기서 거기인 검정 티셔츠를 갈아입으며 거울 앞에서 기웃거리는 걸 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여자아이의 엄마는 애들 학원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여자만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아들과 아들의 여자 친구가 함께 있었다. 카페에 오기 전, 아들의 담임이 전화를 해 여자아이 엄마가 하도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전화번호를 주었다며, 혹시 모르니 내게도 여자애 엄마의 연락처를 알려주마고 했다. 공평하게 개인 정보를 나눠 책임 소지를 없애려는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여자애와 여자애 엄마 앞에서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덜컥 불안감이 가슴을 뚫었다. 십 대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와 드라마가 순식간에 필름 되감기로 지나갔다. 사십 후반, 졸지에 나를 할머니로 만든 걸 머쓱해하는 아들이 고물고물한 신생아를 품에 안기는 상상까지 도착하는 데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뭔 생각을 하는 거니. 미쳤나 봐.’
요동치는 가슴을 누르며 고개를 젓고 카페로 들어섰다. 나를 쳐다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설렘과 긴장이 뒤섞였다. 아들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몇 가닥 남은 귀밑 솜털과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는 키가 크고 한눈에 봐도 예뻤다. 무엇보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우리 아들 눈이 높군’
조금 전 덜컥거리던 가슴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아무래도 딸이다 보니까, 걱정도 되고요. 저희는 통금시간이 8시거든요. 그래서 학원도 안 보내요. 얘 언니도 학원 안 가고 둘이 공부방 다녀요, 세상이 워낙 험하잖아요. 물론 아드님은 요즘 애들처럼 그런 거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같은 아파트니까 혹시나 소문이 나면 저희만 손해잖아요. 애들 아빠가 우리 애 남자 친구 있는 걸 알면 난리 날 거예요. 그래서 아드님 얼굴도 볼 겸, 또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해서 보자고 했어요. 서로 조심하는 게 좋잖아요. 그렇죠?”
“그럼요. 걱정되시죠. 애들이 아직 어리다 보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8시 이후에는 아드님 밖에 못 나가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는 9시 이후엔 핸드폰도 금지거든요. 그리고 주말에는 괜히 돌아다니면 여기저기 사람들 눈에 띄니까. 우리 집 계단에서 만나게 할까 봐요.”
아들은 8시 이후에는 학원만 다니고 여자 친구를 부르지 않기로 다짐하며 나머지도 동의했다. 차와 음료를 마시면서 나와 아들을 주시하던 여자애 엄마는 그나마 정상이라고 판단한 건지 내심 안심하는 눈치이다.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애들이 앞으로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연애를 하니 말이죠. 그걸 담임선생님한테서 우연히 들었거든요. 제가 너무 놀라서 시장 갔다 오면서 부랴부랴 연락드렸어요. 아무래도 어른들이 나서야 할 것 같아서요.”
“네네 이해합니다. 놀랄 수 있죠”
잠재적인 수컷 본능이 언제든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여자애 엄마 말을 격하게 동감해 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멀뚱멀뚱하게 앉아있는 아들을 재차 단속했다.
한 달 뒤, 아들은 자신의 생일에 여자 친구 대신 그녀의 엄마에게서 케이크를 받았다며 감격해했다. 그리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달 뒤, 겨울방학이 얼마 되지 않아 두 초보 연인은 슬그머니 헤어졌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처럼 욕실에서 울지 않았다. 다만 SNS의 프로필이 시커먼 남자애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들에게 물었다.
“ 여자 친구 안 보고 싶어?”
“ 엄마. 사랑이라는 게 원래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태연하게 드라마 대사를 날리더니 이내 게임을 한다. 나는 어느 날 울린 전화에 시시한 시트콤 찍은 격이다.
지금 아들은 친한 누나가 생겼다. 낯선 전화가 또 울릴지, 이번엔 내가 먼저 연락하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