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즈. 하이라이스 아님.
본 글은 앞선 더 랍스터와 같이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런 글은 아닙니다. 배경 지식과 더불어 영화 내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석하는 글입니다. 그리고, 말투도 바뀝니다. 그럼 시작.
High-rise는 이름 그대로 높게 오른 고층 건물을 뜻하지만, 네이버에 하이라이즈라고 검색하면 본 영화가 제일 많이 나온다. 이 영화는 J.G. Ballard의 원작 소설, High-rise를 영화화한 것이다. 소설이 쓰인 때는 1975년, 영국. 영화는 2015년에 개봉하였지만 원작 소설의 시간대를 따라가므로, 그때의 배경을 알아보아야 한다.
건축, 브루탈리즘
우선 건축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아마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띄던 것이 마감되지 않은 듯한 콘크리트로 된 벽일 것이다. 이 건축적인 양식(?)은 브루탈리즘으로, 1950년대 ~ 197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었다.
이름은 béton brut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에서 유래, 건축비평가 Reyner Banham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의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로 Alison & Peter Smithson, James Stirling 등이 있으며 이 양식은 주로 영국 내에서 전개되었다. 첫 브루탈리즘 작품으로는 A&P Smithson의 Hunstanton School이 있다. 날것 그대로의 재료 사용이 가장 특징적이며, 거대하고 단일구조처럼 생긴 콘크리트 건물이 많다.
원작 소설도 이 브루탈리즘 건축 중 하나인 Trellick Tower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타워에 대해 알아보면 재밌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Trellick Tower
Erno Goldfinger에 의해 설계된 Trellick Tower는 이전에 그가 설계한 Balfron Tower의 성공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골드핑거는 자기가 설계한 Balfron Tower에서 직접 살면서 거기서의 생활이 어떤지 직접 체험하였었다. 그리고 그는 주기적으로 칵테일파티를 열어 입주민들에게 직접 건물의 장단점에 대해 듣고, 이 의견들은 트렐릭 타워에 반영되었다.
트렐릭 타워는 당시에 유행하던 브루탈리즘 스타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완공된 1972년에는 브루탈리즘이 저물기 시작하던 때였기에 완공 후에는 유행에 뒤쳐졌다고 평가를 받았다. 유행에 뒤쳐진 것이 모자라, 건축가가 원했던 컨시어지와 보안은 거절당하여 결국 오픈이 되기도 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노숙인들과 마약중독자들이 복도에서 자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후반, 이 건물에서 범죄와 반사회적 행동이 많이 일어났다.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전기와 온수도 끊겼었다. 한 입주민이 승강기가 작동하지 않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다 사망한 사건도 있었고, 여자가 강간당하는 사건, 건물에서 낙하산을 타려고 뛰어내린 사람이 낙하산 오작동으로 낙사한 사건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괜히 건물이 "공포의 타워"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1980년 중반쯤부터 이 건물에 대한 조치가 취해져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정상적으로 거주시설로 사용 중이다.
영화에서 일어난 일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지 않은가? 괜히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건축가가 직접 자신이 설계한 건물에서 생활을 하며 파티를 벌린다던지, 보안의 문제, 각종 범죄와 사건 사고 등 영화와 흡사한 부분이 매우 많다. 건물의 역사가 거의 영화의 스포일러 수준이다!
아, 그리고 이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이다 보니 영화 내 건축물 자체가 브루탈리스트 느낌이 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더 삭막하게 표현한 것도 있지만, 당시 유행했던 건축 스타일이어서 디자인이 그런 것이니, 큰 의미를 담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만약 자신이 스탠리 큐브릭의 팬이라면 이 포스터가 어딘가 조금 익숙할 것이다. 바로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물론 하이라이즈는 다양한 버전의 포스터가 있지만, 이 버전의 포스터가 가장 대표적인 포스터이니 이 둘을 비교하겠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워낙 유명하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다. (궁금하면 영화를 직접 보는 걸 추천한다. 아주 명작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뜻은 여러 가지 뜻이 추측되지만
1. 겉은 번지르르하고 이쁘지만, 사실은 신/정부에 의해 조종당하는 장난감. 혹은,
2.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사라져 가는 개인.
이라 볼 수 있다.
1. 번은 하이라이즈의 상황과 비슷하다. 겉으로는 웅장하고 멋져 보이는, 스타일리시한 건물이지만 사실 그 속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조종당하고 있는 듯이 층을 나누어가며 살고 있다.
2. 번은 개인이 묵살당하는 것인데, 이 해석의 경우에는 아래 삼각형, 피라미드와 대처리즘에 관하여 읽어보면 조금은 들어맞는다. (약간의 비약이 있을 수 있긴 하다.)
하이라이즈가 시계태엽 오렌지의 의미를 차용, 결국 포스터의 이미지도 차용하였다는 것을 알고, 위 두 가지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계속 읽어보길 바란다.
상부가 뾰족한 삼각형의 형태는 마치 엘리베이터 버튼 중 위로 올라갈 때 누르는 삼각형처럼,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왜,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면 누르고 싶어 지는 그런 느낌? 건물 내에서도 이렇게 사선인 벽들이 많고 로비에서는 거의 대놓고 삼각형을 보여준다. 높이 올라가야만 한다고, 그 위는 더 좋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삼각형은 피라미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배우는 먹이 피라미드를 생각해보자. 위는 최종 포식자, 아래는 공급자. 위는 개체수가 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개체수가 많아진다. 사회적인 피라미드도 마찬가지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부는 많아지지만 사람은 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는 적지만 사람은 많다. 하지만 만약 이 아래층이 흔들리거나 변동이 생긴다면, 위층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급자의 수가 갑자기 줄면, 차례로 위층의 포식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처음 고층에 있는 상위 계층 사람들은 영화 내에서 아래층이 어떤지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 작은 문제가 생겨도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볼 수 없었으며, 그저 그들만의 파티를 즐길 뿐이다. 이런 문제들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갈수록 커진다. 작은 문제들이 있을 때는 고층의 사람들은 미동도, 관심도 없었지만 문제가 커지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된다. 내려오지 않던 그들이, 그것도 가장 높은 층의 주민이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견고해 보이던 피라미드에서 아래가 흔들리자 위도 흔들리며 영향을 미친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 수 있지만, 마치 먹이 피라미드에서 공급자의 개체수가 급감하는 느낌이랄까?
피라미드는 밸런스가 중요하다. 위와 아래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안정적이다. 그 어느 부분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그 시스템 자체에도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 '시스템'은 자연적인 것일 수 있고, 인위적인 것, 혹은 국가의 정책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을 읽어보자! (계속 더 읽어보라고 유도하는 건 기분 탓이다.)
근데 피라미드 얘기는 잠시만 넣어두고, 대처리즘이 왜 나오는지,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자.
하이라이즈 영화의 마무리는 어린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나오는 방송은 1970년대 후반 영국의 수상, 마가렛 대처의 연설이다. 마가렛 대처는 '대처리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가렛 대처가 취임하기 전,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은 경제 침체기를 맞이했었다. '영국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때는 영국의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한 재정 악화와 근로의욕 저하 등이 문제였다. 당시의 국유화, 고비용 저효율의 저생산성, 파업, 복지 문제 등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영국 경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가렛 대처가 내세운 정책을 대처리즘이라고 일컫는다. 그녀의 정책의 핵심은, 국가자본주의가 있는 한 정치적 자유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중점을 둔 이 정책은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제 촉진 등 경제 전반적인 개혁이었다.
당시 영국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국영기업이 많은 나라였다. 이를 이 영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한 통제와 컨트롤이다. 마치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이 관리자에 의해 관리되고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라이즈에서는 건축가 로열이 이 관리자이고 당시 영국에서는 정부가 관리자인 셈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즉, 하이라이즈 빌딩과 국가 경제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이를 해결하려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타워에서 파티는 계속되고, 층은 여전히 분리되어있다. 전기가 나가도 제대로 된 해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로열은 위층에서 내려오지도 않으며 탁상공론을 하는 느낌이다. 당시의 영국 또한 근본적인 해결을 제시하지 않는 채 보이는 문제만을 해결하다가 결국 문제가 터진 것이다.
여기서 대처리즘이 들어온다.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가의 통제를 줄이고 더 많은 자유를 준다. 시장경제의 자유를 지지하면서도 적은 개입을 하는 것이다. 완벽한 표현은 아니지만, 국가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민간이 주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이라이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워는 항상 상부층 중심으로, 그리고 로열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의 폭동 - 파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이후 결국 로열은 죽음을 맞이하고 건물에서 위계, 통제는 잠시 사라진다. 혼란스러운 시간이 찾아오고, 결국 잠잠해진다. 영화 후반부 사람들이 날뛰고, 광기스러운 느낌과는 조금 달리,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은 어딘가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비록 배경은 여전히 난잡하고 행동 또한 이상하지만.) 그리고 결국 닥터 랭이 새로운 관리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상층부의 사람이 아닌 25층의 그가 주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대처리즘과 비슷하다. 국가위주로 돌아가던 경제가 바뀐 것이다. 또한 랭이 관리를 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행동에 많이 개입을 하지 않는 모습도 통제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정부의 모습과도 닮았다. 이전 로열의 무관심함과는 다른,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느낌이 강하다.
앞서 얘기하던 피라미드와도 어느 정도 연관 지을 수 있다. 통제로 인하여 딱 맞아떨어지는 피라미드는, 결국 어디엔가 이상이 생긴다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피라미드는 스스로 치유를 하며 더욱 견고해진다.
물론 어느 정도 끼워 맞춤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당시 영국의 배경과, 전체적인 뉘앙스는 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충분하다!
추가적으로 대처리즘을 좋게 표현하였지만, 완벽한 정책은 없듯이 여러 후폭풍을 몰아오기도 하였다. 복지는 나빠지고, 계층의 차이가 심해졌으며 돈만 아는 사회로 바꾸어버렸다는 비평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당시에 점점 나빠지고 있던 경제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치유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내에서의 시대상은 이 후폭풍이 오기 전임을 감안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