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사랑하지만, 늘 결혼을 한다면, 아빠와 정 반대인 사람과 하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끈이 서로를 너무나도 꽉 묶어둔 탓에, 우리는 서로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을 보여주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여유가 없었다. 아빠는 지금보다 훨씬 위계질서가 강했을 직장 생활을 견뎌내느라, 나는 혹독한 입시에 지쳐 이해받을 구멍을 찾느라. 아빠는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거라 믿었을 거고, 그 믿음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는 놀랍게도 자라는 동안의 아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쁜 기억보다야, 기억이 없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또 괜찮지가 않았다.
나는 사랑을 표현받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누고 싶었고, 내 기분을 궁금해해줬으면 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이, 분명히 단단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으면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빠에게는 자식이 물질적 결핍을 겪지 않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랑이었을 것이다. 풍족하게 먹이고,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책임감이 사랑의 다른 말이었을 거다.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달라서 먼 길을 돌아왔다.
내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나’ 일 수 없듯, 아빠도 ‘내가 원하는 아빠’ 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퇴근 후 한 마디도 입을 벙긋하기 싫어 ‘다녀왔습니다’ 한 마디 후,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지는 나, 가족들이 다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하면서 알았다. 아, 아빠는 지쳐있었구나.
사회생활을 하며 점점 내 성장기 때의 아빠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고, 곧이어 아빠의 은퇴라는 대형 사건이 터지며,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변화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빠는 ‘스스로가 원하는 아빠의 모습’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고, 덕분에 지금 우리 가족은 꽤나 화목하다.
그러나 성장기에 느꼈던 결핍은 나의 연애관에도 영향을 주었고, 내가 원하는 남자는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게 되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짓눌러 다정함과 상냥함을 잠시 미뤄두지 않았으면 했다. 그 책임감은 함께 지길 원했다. 무거운 단독 대표 말고 공동 대표가 되어 서로를 책임질 수 있었으면 했다. 금전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한 가지 깨닫게 된다. 아빠와 반대인 사람을 찾겠다고 선언했으면서, 우습게도 나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거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 그래서 높은 성취를 해낸다는 장점도 있지만,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기도 한다는 점. 그리고 늘 이기고 싶어 하는 것. 비록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날 선 모습의 나에게도 걸맞은 짝을 우주가 보내주었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영화 속, 차갑고 완고한 에블린에게 우주가 따뜻하고 다정한 레이먼드를 보내주었듯이 말이다. 늘 져줌으로써 이기려고 고집부리는 내 속 좁은 마음을 무색하게 만드는 사람. 다정함과 배려가 유약함이 아니란 걸 알려준 사람. 그렇게 아빠와 꼭 닮은 나는 아빠와 정반대인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우리가 해피엔딩을 만들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내가 이 사람과 있을 때, 한 껏 올려두었던 가드를 조금 낮추게 된다는 것. 그의 다정함이 옮아 보다 따스한 눈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나도 내가 선택한 사람과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바로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바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