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나나스플릿 Aug 04. 2023

나는 얼마나 준비되었는가

꽤 오래전에 책을 써달라고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나와 그 여행에 대한 경험이 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사실 그렇게 주목받을 수준도 아니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먼저 도전하면 이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받은 일들은 그 가치와 의미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부풀려질 수 있다.


그 신문 기사를 통해 또 다른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고 그러자 몇몇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책을 내고 싶단다. 세상에.. 결국 한 곳과 실제로 도서 출판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책이 준비되고 있었다.


두달 정도에 걸쳐서 130 페이지 정도 썼던 것 같다. 그간의 블로그 내용과 기억을 되새겨 짜내가며 페이지를 '채워갔다'. 책을 썼다기 보다는 채워갔다. 신나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끌려가며 억지로 하는 숙제 같았다.


왜 숙제처럼 느껴졌을까 생각을 해봤다. 일단 나는 그 당시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개발서 같은 것은 꾸준히 읽었지만, 내가 써야 하는 여행 에세이 따위는 오래도록 외면해 왔다. 두 번째,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카피라이터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지만, 에세이 같은 내 경험과 감정을 담은 글을 써본 적은 없었다. 듣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둑질이다.


다 쓴 원고를 살펴보는데 정말 재미라는 것이 없었다. 뭔가 키득키득하며 웃는 포인트도 있고 감동 포인트도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매우 기계적인 콘테츠 쓰레기일 뿐이다. 너무 '티'였을 수도 있다. 숙제는 했으나 목표를 상실한 허무한 그런 상태. 결국 나는 계약금만은 보존했지만 책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내가 출판사라도 그런 책을 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나는 컨템퍼러리 작가들의 연대기를 공부한다. 그들의 삶, 애환, 기쁨 등이 어떻게 작업으로 연결되었는지 조금씩 공부한다. 숙제가 아니라 내가 알아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하면 진정한 공부가 되더라. 그리고 고전 마스터 작가들의 드로잉을 내 방식대로 그려가며 습작한다. 그들이 생각을 따라가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시각예술을 하면서 개인전이 몇 번이고, 그룹전이 몇 번인지가 뭐가 중요할까.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겉으로 흉내내기다. 전시처럼 쉬운 것이 없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전달하려는 바를 깊게 파고들며 건드려야 하는데 그것은 쉽지 않다.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되고 싶은 것과 될 수 있는 것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철저히 준비한다면 되고 싶은 것이 충분히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바라는 지향점에 너무 빨리 가보고자 하는 마음에 많은 것을 놓친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에서 찍는 단 한 장에 사진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시작해야 하는지 단계를 밟아가는 모든 순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 과정이 하나씩 더해지면서 나는 최종 종착지를 만나도 되는 진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과정 따위는 모두 무시하고 그냥 가도 상관 없다. 하지만, 창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경험을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스스로를 준비시켜야 한다. 내가 얻은 감동을 타자에게 전이시키는 것, 나의 경험을 갖지 못한 타인에게 간접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을 배울 때 한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상담은 사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충분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때 진정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단계를 하나씩 밟아온 경험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를 움직일 수 있다.


오늘도 종종걸음으로 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예전처럼 조바심 내지는 않는다. 불안해하지 않는다. 꼭 빨리 갈 필요는 없으니까. 온전히 가면 될 뿐이다. 그것을 이제 깨닫게 된다. 감사한 일이다. 내가 목표로하는 과정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습득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담아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감동은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