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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나나스플릿 Dec 14. 2023

내 속도로 나아가는 하루

아마 뉴욕의 MOMA였던 것 같다.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하나는 가져가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Phaidon Press의 Painting Today를 그렇게 만났다.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은 왜 두꺼울까.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다른 기념품들을 모두 포기하고 이 두껍고 무거운 책을 캐리어어 담아 들어왔다. 30여 만원을 주고 산 이 귀한 책을 난 10년 간 모셔만 두고 있었다.



물론 휘리릭 넘겨가며 그림을 몇 개 보긴 했지만,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 딱 그런 정도로만 이 고급진 양장의 도서를 서재 책꽂이에 담아뒀다.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신줏단지 모시듯 아껴온 책은 여전히 상태가 좋다.



올해 초 제대로 미술 공부를 해보자 다짐하며 3권의 작은 원서를 샀다. 데이비드 호크니, 쟌 미쉘 바스키아, 그리고 에곤쉴레. 모두 타셴 출판사의 40주년 기념판이다. 일단 작고 소장하기 쉬웠다. 이제는 책이 두껍다고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믿는 나이가 아니게 되었다.



이 책들은 한 번쯤 읽어볼 수 있겠다 싶었다. 판형이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고 그림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대가들이 걸어온, 그들이 따라온 시대를 느껴볼 수 있었다. 원서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책을 마지막 끝까지 읽어버렸다. 작가의 작품은 곧 그가 걸어온 삶의 축적판이었구나. 나의 삶이 어떤 작업으로 나를 이끌지가 궁금해졌다.



3권의 책을 한 번씩 더 읽어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바로 또 읽기는 싫더라. 그래서 책장 둘러보다 Painting Today를 집어 들었다. 오.. 역시 묵직하다. 역시 비싼 책은 무거운 것일까. 저자는 현대 미술을 시대별, 테마별로 나눠 조목조목 설명했다. 페이지도 많고 그림도 많다. 중요한 것은 글도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글자도 엄청 작다. 노안이 시작된 내 시력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걸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10여 년간 방치했던 책에 대한 미안함과 게으름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어느 날 저녁 스탠드를 켜놓고 한참을 읽었다. 꽤나 시간이 지났던 것 같았는 한 챕터는커녕 한 페이지도 못 넘어가더라. 이 책에는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미사여구가 너무 많았다. 한 단락 안에서도 찾아봐야 할 단어가 수두룩했다. 좌절했다. 과연 이 책을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처음부터 답답했다.



그래도 나는 우직하게 끝까지 밀어붙일 줄 아는 사람 아닌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꽤나 쏠쏠한 장점이다. 다 읽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거나 하는 50% 확률 안에서 이뤄진다.



하루에 조금씩 읽어가면 언젠가 끝이 나오겠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조건 매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딱 두 가지다.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한번 온전히 읽어내는데 2달 여가 걸렸다.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읽은 페이지가 점차 쌓여가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고 할까.



그러나 빨리 읽고 늦게 읽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속도에 맞춰 꾸준히 가려는 마음.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냥 하면 되더라. 잡생각이 날 때도 그냥 읽기 시작하면 한 단락이 한 페이지가 되더라. 머리가 아플 때면 나는 그냥 한다. 그게 뭐라도 마음을 먹었으면 밀어붙이는 게 좋다. 뭐라도 깨닫는 것이 생기니까.



Painting Today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2-3차례 읽어봐야겠다. 인생에 무엇이 되었든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것은 없지 않은가. 무던한 반복 속에서 이해에 대한 깊이가 생긴다. 쉽게 이뤄지는 것은 없다. 반복의 힘,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서 그 파이를 키워가다 보면 마지막 순간 나라는 인간을 온전히 마주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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