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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나나스플릿 Dec 20. 2023

서사의 시작은 기다림이다

궁금했다. 나의 서사를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 것인가.


나무늘보 같지만 오늘도 계획한 만큼의 책을 보고, 또 그만큼의 그림을 그렸다. 아주 느렸지만 지난 1년 나는 나의 보폭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긴 하는 건가 진정 의심했건만 그래도 몇 걸음 걸었더라. 가끔은 뒤를 돌아보자.


아마 몇 년간은 목표를 향한 이 지루한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좀 지쳐도 상관없다. 내일은 또다시 시작되니까. 매일 뜨는 해가 지겨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일 뜨는 해 덕분에 또다시 기회를 얻었다 말할 사람이 당신이길 바란다.


모든 것은 하나를 위한 준비 운동일뿐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서사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페이지를 시작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는 쌓여가는 지루한 하루의 연습이 알려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미 보다 삶을 겸손하게 대해봤는가? 겨우 1년도 못 채우고서 감히 내 서사를 함부로 시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매미는 5년 11개월을 깊은 땅 속에서 그의 서사를 꿈꾼다. 인생의 99%를 땅 속 바쳐 에너지를 모은다. 그가 비로소 땅 위에 존재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들썩인다. 그의 청량한 서사에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5년 11개월 묵은 목청이 우렁차다. 귀를 막아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애절함이 땅을 흔든다.


인생의 9할까지는 아니라도 내 서사를 위한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가 정한 삶의 목표와 궤적을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다.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절대적인 시간이 분명 필요하다.


나의 시간은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움직임이 하나씩 모여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감이 조금 잡힌다.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한다. 그것을 느끼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매미처럼 허물을 벗고 승천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너무도 짧고 찬란하여 아마 스치듯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고독의 시간이 긴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하니까.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날아오르고 소리를 내는 것보다 지루한 준비가 더 중요한 이유다.


나도 내가 나를 만나는 순간이 찬란하길 바라며 내가 파 놓은 땅 속에서 묵묵히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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