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순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만 46세를 몇 주 앞에 두고서야 모든 실마리가 제자리를 찾고 비로소 나는 완전한 독립을 꿈꿨다.
나는 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왔고 괴로워 함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고 이겨냈을까? 혹자는 바로 버려 내 칠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나는 끈질기게 그들을 믿고자 노력했고 보듬었고 포용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그를 존경했고,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경계성 인격장애가 심히 의심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판정받고 치료 중이다. 그 외에도 애정 결핍으로 늘 칭창에 목말라 워커홀릭과 알코홀릭이 되어버린 나의 엑스, 중학교 때부터 죽이 잘 맞았던 나의 오랜 친구도 결국 애정 결핍으로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동업을 하다 실패했던 그 형은 스피드를 즐겼다. 동승자가 느끼는 스피드에 대한 두려움을 보고 즐거워했다. 불안을 즐기는 사람들. 불안한 사람들. 불안해야 편한 사람들. 이상하게도 나에게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꼬였고, 나는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한계는 있다. 선을 넘어오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린다. 그렇게 잘 맞춰주다가도 어느 정도 선을 넘었다 싶으면 매몰차게 정리한다. 그게 나였다. 나도 살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매몰차게 정리하다가도 마음은 약해졌다. 또 허용하고 또 허용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정리하고 나는 그렇게 떠났다.
안타까웠다. 그들이. 힘들어 보였고, 도와주고 싶었고, 그리고 도와주면 해결될 줄 알았다. 결국에 모든 것은 나의 착각임을 알았을 때는 허무함과 답답함만이 나를 바닥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계속적인 독서와 자아성찰이 나를 살렸고, 긴 터널을 나와 빛을 보게 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은 법. 끝은 분명히 존재하고, 괴로움에서 배우는 것은 정말 값지다. 시간이 허망하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그 시간이 고마울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불안한 삶을 살았다. 나는 종종 부대낀다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삶을 살아서 그렇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니까. 늘 그러지 않았던 것은 우리 아버지가 옆에 바위처럼 서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말 단순하고 성실하고 우직했으니까. 평생 그가 밥 투정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조금만 비위를 맞춰도 되는 사람을 우리 엄마는 늘 괴롭혔던 것 같다.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도 이해 못 한 것 같으니까. 더 이상 그 이유를 헤짚어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생각보다 우리가 삶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많이 없더라. 특히 오랜 세월 한 방향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변화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뿐이다.
불안한 사람은 불안해야 편할 때가 있다. 불안한 상태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까 불안함을 극도로 회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불안으로 불안을 극복한다. 그냥 넘어갈 일도 불안하게 추궁해야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스스로 불안에 휩싸이다 보니까 자신의 생각 밖에 고려하지 못한다. 남을 고려할 여유가 있겠는가?
불안한 삶을 오래 영위한 사람과 함께 사는 방법은 크게 2가지다. 그 불안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사는 것. 결국 부처가 되어야 한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아미타불을 외치면 된다. 그게 되지 않으면 뛰쳐나가야 한다. 고요는 불안을 안기에 너무 그릇이 작다. 어떻게든 담아보려 해도 이내 터져버린다. 고요가 터지면 불안 보다 더 큰 불안이 찾아온다. 고요를 다시 찾기 위해 어디든 떠나야 할 것이다.
나는 포용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겁도 많은 나였으니 내가 어린 시절 택할 수 있는 길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길이었을 것이다. 가끔 터져버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다. 이내 고요함을 되찾고 다시 불안함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나는 불안에 익숙해지고, 불안을 이겨냈고, 불안에 무뎌졌을 것이다.
불안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요함을 찾아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잡기 위해 물을 찾듯이, 불안한 사람들도 살기 위해 고요한 물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이 상극은 조화롭기도 하지만 무섭게 서로를 헤치기도 한다. 불안은 중도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일 뿐이다.
이들에게 잘못은 없다. 그냥 불안한 가정에서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란 것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했고, 알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만나게 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 어울릴 방법을 도대체 모른다. 그리고 이내 불안한 상태를 찾아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곤드라지게 취해버리거나, 아주 무서운 영화를 본다거나, 혹은 스피드를 즐기며 죽음의 직전을 왔다 갔다 한다. 혹은 자살 시도로 불안감을 최고조로 조정할 수도 있다. 진짜 어떻게 되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회귀적 치유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살기 위해 내가 편했던 방법으로 안정을 취한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들을 멀리하게 된다.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세뇌된 마냥 세차게 흔들릴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깨달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대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정 나라는 사람으로 완전히 독립하려고 꿈틀거린다. 우리 부모의 일부가 아닌 나 자체로 인생을 그려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나의 부모를 이해하고, 세상과 1:1로 만나는 순간이다.
아직 갈길이 더 멀었지만 이렇게 깨달은 바 감사하는 마음에 몇 자 적어 기록을 남긴다. 나라는 인간을 탄생시킨 세상의 부모는 모두 대단하다. 다만, 어떤 환경에서 양육되느냐는 DNA의 연결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세상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