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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Dec 30. 2019

겁쟁이의 고백(2)

그렇게 뒤집어씌워야만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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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달간 일을 했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청춘을 불태우고… 아니, 팔을 슉슉 젓고 있었다.


마트 특성상 여성 운전자, 여성 고객님 비율이 높았다. 그래서 빈 주차 공간이 어딨는지 수신호로 알려주는 일 외에 파킹 자체를 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대신 주차해달라는 고객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면허가 없는 관계로.


종종 작은 심부름을 부탁받기도 했다. 고객님이 넘겨주는 빈 카트를 받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몇 시냐고 물어보면 알려드리고,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알려드렸다. (내가 몇 살인지가 왜 궁금했을까?) 고객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비록 시급을 받는 알바였지만 나는 '주차 관리 요원'이었다. 나름의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내가 있는 주차 구역을 관리했다. 누가 알려준 적은 없지만 고객님을 위한 서비스에 나름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마트 주차장에서 뺑소니 사고가 난다면 '그 요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쾅!


누가 알려준 적 없고, 내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상황이 내 앞에서 벌어졌다. 한 고객님이 쇼핑을 마치고 차량을 빼다가 반대편에 있는 차량을 박았다. 한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였다. 내가 근무하던 시간, 내가 관리하던 주차 구역이었다. 내가 "어…" 하는 사이 그 차량은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근무 교대까지 5분 정도 남아있었다. 이미 떠나버린 '가해 고객님'(이하, 가객님)을 잡아올 수도 없었기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반대편 차량 주인인 '피해 고객님'(이하, 피객님)이 나올까 두려웠다.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교대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내가 방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에 떨며 자책하는 사이 5분이 훌쩍 지나갔다. 다음 근무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가객님을 잡지 못했으니, 이 상황에 대해서라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찜찜하게 근무 교대를 했다. 휴게실로 걸어가는 길. 멀리서 한 고객님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피객님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피객님이 나타났다. 피객님은 방금 나와 교대한 근무자를 불렀다. 거기까지만 보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초래한 상황에서 도망쳤다.


담당 관리자가 불려 가고 CCTV를 돌려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호출되나 싶었지만 불려 가진 않았다. 나는 한번 더 그 상황에서 도망쳤다.


누군가는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 대신 뒤집어썼을 것이다. 나는 겁쟁이였고, 비겁했고, 비열했다. 그날 이후, 난 주차 요원 일을 그만 두었다. 완벽한 도망이었다.


그 알바가 내게 무엇을 남겼냐고 묻는다면 양심의 가책과 검게 그을린 얼굴을 남겼다고 말하겠다.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최초의 경험과 검게 그을린 양심까지도.




너무 어렸고 너무 두려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사죄하고 싶다.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시간이 잘못을 가릴 수는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가 자초한 상황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돌고 돌아 나는 다시 그 마트에 다닌다. 나는 알바에서 고객이 되었고, 마트는 주차 요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산한 지점이 되었다. 내가 몸 담았던 마트는 예전의 영광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리 한가하냐고 묻는다면, 주변에 워낙 많은 마트들이 생겨서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친 사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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