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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Nov 02. 2020

늦었지만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비보를 접한 건 저녁을 준비하면서였다.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르고 쌈채소를 씻는데 한 라디오 뉴스에서 소식을 전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흐르는 물을 잠시 멈추었다. 상추를 씻던 내 손도 잠시 멈추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른 채널로 돌렸다. 그 라디오 채널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착잡한 마음으로 저녁 준비를 이어갔다.


아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따라 퇴근이 늦은 아내에게 어서 손을 씻고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각자의 일터에서 퇴근한 우리는 소박하게 차린 밥상에 마주 앉았다.


나는 조용히 밥을 떴고, 아내는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냈다. 금요일 저녁이라도 된 것처럼 아내의 표정은 밝았다. 듣는 둥 마는 둥 들으며, 나는 들려오는 이야기에 온전히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밥은 필요 이상으로 맛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슬픔을 느끼고도 입맛이 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준비한 저녁을 모두 먹고 그릇을 정리하는데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다시, 오늘의 비보를 에둘러 전했다. 디제이는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했고 그녀의 명복을 빌며 마지막 노래를 선곡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베테랑 디제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아마 아내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설거지를 하며 아내에게 그 슬픈 소식을 전했다. 퇴근 후 저녁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라디오 디제이의 마지막 멘트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함께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평소 장난 삼아 거짓말을 하던 나를 후회했다.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기꺼이 양치기 소년이 되기로 했다.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 믿지 못했으므로. 억울하지 않았다. 내가 양치기 소년이 아님을 곧 알게 될 것이므로.






언제부터 그녀의 팬이었냐고,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었냐고 나를 비난해도 좋다. 나는 그녀의 진성 팬도 아니었고 그녀가 가진 어려움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기껏해야 오늘에야 관련 기사를 찾아본 수많은 대중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써내려가는 건, 그녀에게 미안하고 그녀를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안다. 늦었음을 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그 슬픔에 동참하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오늘을 기억하려 한다.







*제가 오늘을 사는 사이, 누구는 아파하고 누구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제가 모르는 누군가는 그랬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그 아픔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괜찮다면 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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