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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Jan 22. 2021

낡은 운동화

 어디서 샀어?


공항에서 낯선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 같으면 속으로 삼켰을 말을 그 외국인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외국 사람이 건네는 물음에 난 당황했다. 아마 영어로 물어왔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나는 여기에 신혼여행을 왔는데, 이곳에 오기 전 한국에서 샀고, 이 브랜드 매장에 가서 아내와 커플로 신발을 골랐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미드 한가운데 떨어진 난 머리가 복잡했다.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위기를 벗어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인터넷….


내 짧은 대답에 그 외국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브랜드의

평범한 신발이니 분명 인터넷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반바지에 새 운동화를 신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건, 기분 좋은 경험이어서 그럴 테다. 그곳이 야자수 잎 늘어진 휴양지였기에 그럴 테고 신혼여행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이었기에 그럴 테다.






몇 년이 지나, 그 운동화는 낡은 모습이다. 여기저기 해지고 빛을 잃었다. 당연히 '새 신발에서 나오는 묘한 광채'도 없고 어디서 샀냐도 묻는 이도 없다. 밑창은 닳고 닳아 깔창과 조우할 지경이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쉽지 버리게 되지 않는다.


오래된 물건은 그만큼 주인과 함께한 시간이 길다. 특히 몸에 걸치는 물건은 그 사람의 습관을 간직한다. 주인의 몸에 맞춰진 것이다. 한쪽만 닳은 신발 밑창은 내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납작해진 신발의 모양새는 내 발을 편하게 감싼다.



이제 진짜 좀 버려야지.



낡았지만 그 어떤 신발보다 편한, 그 낡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향했다. 오늘만 신고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그 운동화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점심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눈길 위를 씩씩하게 헤쳐가는 헌 운동화가 대견하다. 그동안 나를 이곳저곳으로 데려다준 운동화. 긴 시간 함께한 운동화. 지나가던 외국인의 발길을 멈추게 했던 운동화.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게 가장 편한 운동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애틋함마저 들었다. 오래 탄 자가용을 폐차하러 갔는데 막상 폐차장 구석에 놓인 자신의 차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정을 떼기가 쉽지 않다.


이 녀석을 보내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거 같다. 돌아오는 주말엔 내 손으로 깨끗하게 세탁이나 해줘야겠다. 내 기억과 흔적과 습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녀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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