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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Dec 22. 2021

귓등은 억울하다

귀에 걸치는 것들이 점점 늘고 있다. 안경, 마스크, 이어폰…. 여기에 귀걸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겨울을 맞아 귀마개를 착용하는 이도 있다. 귀에 펜을 꽂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귀는 무언가를 매달거나 얹기에 유용하다. 원래는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대충 보아도 우리의 귀는 소리를 모으거나 소리의 방향을 알기에 적절한 모양을 하고 있다. 단, 귓등만 빼면 말이다. 


우리말 중 '귓등으로 듣다'라는 표현은 '듣고도 들은 체 만 체 하다'는 의미다.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귓등으로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귓등은 과거보다 훨씬 바쁘다. 아니 유용하다. 귓등이 없었다면 우리는 마스크도 쓰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스크를 오래 쓰면 귀가 아픈 것일지 모른다. 귓등은 애초에 그런 역할이 아니었다. 귓등은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귓등은 억울하다. 그래서 아파한다.


안경을 걸치는 인구를 점점 늘어나고 있고, 마스크를 완전히 벗는 날은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귀에 또 무엇을 걸치게 될까. 먼 미래에 우리는 귀에 또 무엇을 얹고 살아갈까. 


현대인은 편리한 동시에 자연과 멀어진 삶을 택했다. 자연의 입장에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꾸 덧대고 가려야 하는 우리이기에 귀는 바쁘다. 먼 미래, 우리의 후손은 우리보다 더 큰 귀와 넓은 귓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Photo by Brend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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