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숙였다
오후 2시, 회의실로 향했다. 화요일 회의는 오랜만이었다. 정기 회의는 아니었고 인사철마다 진행하는 임시 회의였다. 안건이 많지 않아 금세 끝났다. 이런 회의라면 매일 해도 나쁘지 않겠네, 하고 일어서려는 찰나. 회의를 주관한 상급자가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회의록은 누가 쓸건가?
회의록? 이게 기록을 남겨야하는 회의였구나. (이런 건 회의 초반에 미리 정했으면 좋잖아!) 어쨌든 회의록 정리할 사람을 정하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들면 나를 시킬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아니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이런 내가 아니었다. 원래 이런 말을 외치던 나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자진해서 "내가 하겠다" 했을 때 받는 잠깐의 박수와 심리적 만족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젠 싫다. 일이 싫어졌다기보다는 사람이 싫어졌다. 특히, 나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싫어졌다.
세상엔 당연한 게 없는데,
그렇게 당연한 듯 행동하면,
영원히 당연히 그런 일을 하게 될 거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말 좋아서 하는 줄 알더라. 그래서 오해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그래서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마치 눈치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가위바위보 하시죠, 사다리를 타던가.
성격 좋은 선배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모두가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싫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도, 이겨보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나도. 그 상황도.
가위! 바위! 보!
갑자기 초등학생이 된 어른 8명은 힘차게 구령을 외쳤다. 8명 중 6명은 보자기, 2명은 가위였다. 내가 가위를 냈다. 이겼다! 나는 안도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다시 가위바위보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결국 그 회의에 참석한 막내가 꼴등을 했다고 한다. 막내는 선배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회의록 작성의 임무를 맡았다. 다행히 과정은 아주 공정했다. 가위바위보는 언제나 공정하다.
왠지 미안했다. 나 때문에 막내가 회의록을 작성하게 된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한 게 창피하진 않았다. (살짝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나쁜 선배가 되어가는 것인가.
내일은 막내 어깨라도 한번 도닥여줘야겠다.
*어느덧 <일간 서민재> 30번째 글입니다. 연재를 시작하고 매일 또는 격일 간격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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