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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Dec 05. 2019

연가의 쓸모

연가보상비는 연가를 보상해주지 못한다

지난 월요일. 서울의 한 지하철에서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일부러 엿들었다기 보단 그냥 내 귀에 들어왔다. 모르는 이의 사생활을 염탐하는 것 같아 듣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 들려왔다. 그렇다고 내 귀를 틀어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30대 중반의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저녁 7시 무렵이었으니까, 아마도 퇴근길에 친구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응. 남은 연가 다 쓰려고. 나 이제 눈치 안 보고 연가 다 쓸 거야."


남은 연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매 연말 모든 직장의 고민이 아닐까. 다만 행복한 고민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내 근무 일수에 비례하여 받은 연가지만 어째 내 마음대로 쓰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연가를 남김없이 사용할 거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그의 당당함에 이끌려 더욱 그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남은 연가 다 쓰려면 종무식도 빠져야 되는데… 그냥 빠지려고. 작년에도 종무식 안 갔다고 엄청 욕먹었잖아. 우리 부장이 나 종무식 안 왔다고 뒤에서 엄청 욕했대."


아마도 (당연하게도) 그의 당당함이 소속된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듯했다. 공감, 연민 등의 감정이 느꼈다. 어느새 내게 없는 당당함을 가진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아니. 내가 내 연가를 왜 마음대로 못써? 맘에 안 들면 짜르라고 그래!"


자를 테면 자르라지. 클라이맥스까지 듣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힘들게 하였을까? 우리의 연가는 어떤 쓸모를 가지고 있을까? 종무식에 불참한 후배를 뒤에서 욕한 부장은 어떤 마인드의 소유자일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강요당한 조직 생활이 아니었을까. 개인의 연가는 조직 생활에서 별 쓸모가 없지 않을까. 그 부장은 조직 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조직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배가 고프다.


우리 사회에서 연가가 쓸모를 가지려면 '조직 생활'과 '개인 생활'을 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사적인 영역의 무언가를 위해 내 연가를 쓰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건, 연가는 내 것이지만 나는 회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과 개인의 구분이 모호한 집단에서 연가는 그 효용을 다하기 힘들다. 그런 집단에서는 연가도 퇴근도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미사용 연가를 돈으로 바꿔주는 '연가보상비' 제도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연가보상비는 연가를 보상해주지 못한다. 연가는 무엇으로도 보상되기 힘들어 보인다. 연가는 모두 사용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쓸모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부족하지만 <일간 서민재> 연재를 시작합니다. 작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게 아무튼 뭔가 쓰려 합니다.

*매일 또는 격일 간격으로 쓰려 합니다. <일간 서민재>지만 <격, 일간 서민재>가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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