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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Mar 04. 2020

오늘도 나는 내 책을 샀다

불쌍한 내 새끼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독서'라고 말한다. 별다른 취미가 있지도 않거니와, 독서는 취미로 삼기에 그럴듯해 보인다. 사실 다독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독서를 취미로 삼지 말라고 한다. 독서는 일상이자 숨 쉬는 것처럼 삶의 일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내 취미는 독서이다.


책을 읽으면 삶이 변한다는 말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퇴근 후 조금씩 책을 읽었다. 독서에 흥미를 가지면서, 좋은 책을 읽으면서,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내 이름으로 된 책 내기'는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이 막연한 기대는 어느 해의 목표가 되었다. 그 해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일 년.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 책'이 출간되었다. 주제 선정, 자료 수집, 원고 집필, 원고 투고, 출판사 미팅, 계약 및 출간까지 긴 여정이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경험들이 나를 흥분시켰다. 출판사에서 작가라는 호칭으로 나를 불렀고,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직업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자식 같은 내 책이 출간되고 나서는 매일이 흥분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예스24 앱부터 열었다. 앱을 열고 내 책을 검색하고 판매지수를 체크했다. 판매지수가 껑충 뛰기를 매일 바랐다. 그러나 판매지수는 나의 기대를 한참 밑돌았다.


처음의 흥분은 실망이 되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오나 생각했다.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나름 여러 시도를 해봤다. 서점에 직접 방문해 책을 홍보했다. 작은 강연회도 열어보았다. 주요 인터넷 서점을 돌며 내가 내 책을 주문했다. 근처에 서점이 보이기만 하면 들어가 내 책을 샀다. 내가 직접 구매한 것만 족히 200권은 되는 것 같다.


결국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직업이 되지 못했다. 그저 경험에서 마무리되었다. 요새도 가끔 예스24 앱을 열고 내 책을 찾아본다. 오늘도 서점에 들러 내 책을 샀다. 구석에 있는 내 새끼를 보면 안쓰러워 자꾸 사게 된다.


예전 어느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가수가 레코드 가게에 본인 앨범이 재고처럼 쌓여있는 걸 보았단다. 그리고 그 가수는 가진 돈을 털어 앨범 20장을 그 자리에서 샀다고 한다. (예전에는 가수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 씨디 등을 가게에서 사야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난, 그 가수 참 불쌍하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서점에서의 내 모습이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나의 바람은 그저 헛바람이었다. 첫 술에 배부르길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건방졌다. 겨우 졸저 한 권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다니. 소중하고 작은 성취에 감사하며 다음을 준비했어야 했다. 멀리 보고 겸허했어야 했다.


27년의 옥고를 치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에게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감옥에서 견뎌내었냐고.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답했다.


"난 견뎌낸 게 아니라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더 좋은 책을 쓰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꾸준히 읽고 쓰고 나아갈 것이다. 헛된 바람은 버리고 나의 때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 않다. 견디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다음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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