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아침부터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중간보고 날이었다. 그 전날 저녁까지 미국 동료, 나, 동료 A와 열심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떨렸지만,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상사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미팅 10분 전,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A가 매우 흥분해서 속사포로 말을 건네왔다. 어제저녁 집에 가던 길에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슬라이드를 조금 바꿨다며 괜찮냐고 물었다. 우리가 준비한 내용의 방향성에 갑자기 의문이 들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며 횡설수설했다. 급한 마음에 어서 파일을 열어 읽어보았다. '조금' 바뀐 수준이 아니라 흐름 자체가 바뀌어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다.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우리가 원래 준비한 내용을 하고, 미팅 후에 발표하자고 설명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A는 자신이 맞는 말만 하는데 마치 내가 훼방을 놓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는 사이에 부장과 팀장이 회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나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이, 그녀는 자기가 바꾼 내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팀워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표가 끝나갈 무렵 부장님은 잠깐 멈춰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발표 내용을 누구와 논의한 것이며, 어느 정도 컨펌받고 진행한 내용이냐고 물었다. 중간발표인데 진행 사항이 그에 못 미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며. 옆에 있던 팀장님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A는 우리가 진행하던 내용에서 갑자기 조금 바꾼 거라 팀장님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작업한 내용이라며 강조했고, 나는 화가 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팀장님과 부장님은 함께 별로 내용이랄 게 없다는 게 혹시 정보를 수집할 곳이 부족했는지, 방향성을 모르겠는지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나는 우리가 준비한 내용 중 이런 것도 있다며 기존 슬라이드 몇 개를 보여주었지만, 부장님은 일단 다음 미팅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갈등은 점점 깊어져 갔다, 아니 나만 더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A가 내게 미안해할 거라고 나도 모르게 예상했다.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여서 미안하다, 준비하던 내용이 아닌 걸 보여줘서 결과가 안 좋았으니 그래도 미안해하거나 민망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A는 늘 내 상상을 넘어섰다. “와 이거 어떡하지? 앞으로 할 게 더 많아진 느낌이야.” 팀장님에게 말할 때도 나를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걸 빼먹지 않았다. “저희가 준비한 내용이 사장님께 전달이 잘 안 된 거 같아요.” 마치 이해를 못 한 부장님에게 책임이 있다는 듯이, 그리고 준비를 같이한 ‘우리’를 생각해 주는 팀워크가 새삼 눈물겨웠다.
상식적이지 못한 이런 일에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평소에도 자기 맘대로 밀어붙이길 좋아하는 A, 다른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 그동안도 쉽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당장은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화가 나 그녀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내겐 너무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A에게 무어라고 해야 할까.
챗GPT에게 물었다. "일을 제멋대로 하고, 급작스레 변경하는 동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가 무어라고 해야 할까."
챗 GPT의 조언,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럴듯한데?
1. 동료에게 솔직하게 의사소통하기
갑자기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동료에게 대면하여, 차분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의견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경이 어떻게 여러분의 업무와 전체 팀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 대화 도중에는 전문적이고 건설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상대방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
동료의 행동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들은 새로운 정보나 예측하지 못한 상황과 같이 갑작스러운 일 처리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함으로써 공통된 목표를 찾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3. 영향을 논의하기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동료가 업무와 팀의 목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공유하세요. 마감 기한을 지키는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스트레스를 유발하거나 혼동을 야기하는지 설명해 보세요. 결과를 강조함으로써 더 나은 계획과 조율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4. 해결책 제안하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제안을 제시하세요. 예를 들어, 변경 사항을 위한 명확한 마감 기한 설정, 업데이트를 위한 의사소통 프로토콜 수립 또는 팀 구성원을 의사 결정에 참여시키는 등의 제안을 할 수 있습니다. 협력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은 향후 동료의 급작스러운 일처리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5. 변경 사항 문서화하기
마지막 순간의 변경 사항과 그것이 업무에 미치는 영향을 기록해 두세요. 이러한 문서는 문제를 상급자나 인사 부서에 대화를 요청해야 할 경우 유용할 수 있습니다. 빈번한 변경으로 인한 혼란을 입증하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6. 필요한 경우 상급자 참여하기
문제가 지속되고 업무 수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상급자의 개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중재하고 지도를 제공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한번 솔직한 대화를 하고 그녀를 이해해 보자.
화가 난 마음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작업하는 미국 동료에게 (시차로 오후에야)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고, 내가 어떤 대화를 할 건지도 미리 언질을 주었다. 분노를 애써 걷어내고 A에게 물었다.
"A님이 갑자기 발표 내용을 바꾸어서 오늘 아침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좋다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레 바꾸고 발표 직전에 통보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먼저 그렇게 하게 된 계기를 물어봐도 될까요?"
"더 잘해보고자 했던 마음은 알 것 같아요. 같이 준비하면서 부족함을 느꼈다면,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고 소통하고 싶은지 의견을 주세요."
혹시나 A가 이런 내용을 부인할까 싶어, 미국 동료와도 함께 있는 온라인 미팅에서 물어봤다.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면하는 것보다 내 마음도 훨씬 편했다.
A는 아침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고, 얘기하다 보니 본인도 그래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변명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은 잘못되었던 걸 인정했지만, 본인이 발표한 내용이 여전히 더 좋은 내용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팀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이 상황은 매우 억울할 뿐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들을 충분히 듣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나는 A에게 이런 일이 팀에 주는 영향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고, 그동안 준비한 내용이 무산된 거 같아 허무했으며 시차로 참여하지 못한 미국 동료에게도 얼마나 미안했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함께 일하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요청했다. 앞으로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메신저나 이메일로 대화를 남겨두면 확인하겠으니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경을 하고 싶으면 연락을 주면 좋겠다고. 내가 만약 제시간에 확인을 못하더라도 미리 얘기를 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러니 같이 의견을 합치지 못한다면, 같이 하는 일은 맘대로 바꾸지 말아 달라고... 알아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A는 최소한 미리 얘기를 해주겠다며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 아직 프로젝트가 끝난 것도 아니고, 뭐 아주 큰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니 나도 여기서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챗지피티가 제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다음부터는 합의한 내용 중 중요한 것들은 적어두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로 매일 몇 시간을 같이 일하기에 굳이 서로 다 알고 넘어가는 내용을 일일이 회의록을 적어두진 않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래도 좀 굵직굵직한 내용은 적어두고 A와 다른 동료에게도 보내두었다. 그들이 확인을 안 할 때가 더 많았지만, 혹시나 찾아올 비슷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에 추가할 내용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곧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출간 안내
아프리카에서 진행했던 디자인 프로젝트를 포함해 "지속가능성"과 "디자인의 가능성"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 <아프리카로 간 디자이너>를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