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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Dec 03. 2020

네덜란드에서 꼰대가 되다

- 내가 바로 '젊은 꼰대'였다니 -

    같은 시기에 석사 과정을 들은 네덜란드인 친구 중에 아직 취업을 안 한 친구가 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특별히 부족한 구석이 있는 친구가 아니다. 정말이지 본인의 의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가끔 만나면 솔직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오지랖 넓게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친구는 프리랜서로 잠깐잠깐 일을 하기도 하고 한동안은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물론 여기는 인건비가 꽤 높으니 알바로도 적당히 벌어 적당히 사는 것으로 보였다. 방세와 식비 정도는 해결하니 경제적 독립도 유지하면서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코로나 이후로는 카페 알바는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얼마를 버는지도 모른다. 주 몇 시간 일을 하는지도, 정해진 시간으로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친구를 보고 있으면 옆에서 보는 내가 괜히 조바심이 났다. 석사까지 공부한 게 아깝지 않은 건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벌어야 저축도 할 수 있는 건 아닌지.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곤 있는지. 공부를 더 할 생각은 없는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했나 보다. 일자리는 어디서 찾아보는지, 포트폴리오는 만들고 있는지, 요즘 취업하기엔 이런 분야가 괜찮은데 한번 전환해볼 생각은 없는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자꾸만 던졌다. 그 친구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몇 주 간격으로 구인 공고도 메신저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늘상 친구는 반응이 미지근 했다. 별로 대답도 시원찮고 취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괜한 잔소리를 하던 나도 내풀에 지쳐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그러다 또 오랜만에 보게 되어 근황을 주고 받았는데, 그 친구는 꽤나 잘 지내고 있었다. 취직은 여전히 하지 않았고, 커리어를 급 전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관심이 있었던 프로그래밍을 배워 평소 생각하던 아이디어를 구현해보기도 했고, 관심사에 꼭 맞는 프리랜서 기회도 여럿 생겨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옆에서 잔소리를 하던 나 혼자 계면쩍다. 


꼰대가 바로 나다!


   한국 사회에는 정해진 궤도가 있다. 정해진 궤도를 따르면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 명문대 타이틀, 전문직이나 취업하기 좋은 전공 선택,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 정해진 궤도는 보장된 미래를 준다. 그렇기에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한 스펙을 쌓고 노력하고 비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런 삶이 모두에게 꼭 들어맞는 방식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그 대안의 삶이 트렌드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니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다. 취업, 결혼, 출산... 전통적인 가치들이 흔들리고 삶의 방식도 바뀌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대안을 찾는 다며 다른 세상을 경험하러 왔다. 그런 내가, 그 친구에게는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잔소리를 해댔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친구로서 걱정한다며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그 친구의 방식을 함부로 평가하고 내 맘대로 조언을 해주었다... 내 맘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그 친구가 하는 일이 가치가 낮아보인다,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 말그대로 평가질을 했다. 내 기준도 내 좁은 식견에서 나온 선입견에 불과하다 . 이건 바로 내가 치를 떨며 싫어하는 꼰대의 모습이다. 나도 모르게 꼰대의 특징들을 하나씩 섭렵하고 소위 말하는 '젊은 꼰대'가 되어 그 친구를 닦달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 친구는 내가 자신의 근황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덜란드 화법에서는 숨겨진 의미까지 주고받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속마음까진 파악을 못했겠지 (제발, 그랬으리라 믿는다).


    우리 삶에 정해진 궤도는 없다.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른 목표를 따라 다른 가치관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정해진 궤도가 보장해주는 삶만이 성공은 아니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간다고 무조건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도 우리 세대 들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신종 꼰대가 된 내가 그 입장을 조금이나마 대변해보자면... 나는 내 친구가 정말 행복하길 바래서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모습, 순수한 열정과 취향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풍족하고 윤택한 삶을 살기 바란다. 어쩌면 친구를 통해 내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궤도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자꾸 뒤돌아보는 내 모습,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겪는 좌절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은 이런 경험은 피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난 내 친구뿐만 아니라 누구든 행복했으면 좋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목표를 따라가며 충분히 만족하며 삶을 누리면 좋겠다. 그게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과 행복과 다르다 해도, 있는 그대로 존중받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충분히 먹고 살만큼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길 바란다. 난 너무 이상적인 꿈을 꾸는 것일까?




다시 그 친구의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나는 그 친구가 무엇을 하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패를 겪더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고, 또다른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친구가 행복하지 못할 이유도, 내가 함부로 평가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믿음을 그대로 나에게도 준다. 내가 날 믿지 않으면 누가 날 믿어줄까. 그리고 오늘부로 꼰대 역할은 끝이다. 얼마 안가 또 꼰대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와 날 괴롭히겠지만... 정말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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