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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Dec 09. 2020

1년 전 멈춰버린 관계를 풀다

P.S. 내게 다시 기회를 줘서 고마워!

내가 프리랜서로 일했던 B 회사에는 케냐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그래서 작년 여름 나이로비에 다른 일로 출장간 낌에 B 사무실에도 잠깐 들렀다. 온라인으로만 만났던 동료와 인사도 하고, 미팅도 잡아 함께 한나절을 보내고 나왔다. 이후에 몇 동료들은 네덜란드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나이로비 오피스가 베이스인 동료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도 달라져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데, 그러다 로즈라는 동료와 1년 만에 온라인 미팅을 하게 되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어 줌에 접속했다. 그런데 로즈의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은지 카메라 반응이 한참 느렸다. 음성도 몇 초씩 늦게 전달되고 있었다. 배경에는 왠지 모를 잡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로즈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 들겠는데 그 와중에 로즈는 무언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소리도 볼륨을 높여서야 겨우 알아들었다


근데 한다는 말이,

"저번 날에 인사는 왜 안 하고 갔어?” 였다.


응?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대체 무슨 인사?

처음엔 내가 잘못 알아 들었나 싶었다. 영 모르겠어서 그 뜻을 물어보려는 찰나에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


로즈는 1년 전 그 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방문하던 날, 나는 저녁 늦게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애초에 짐도 다 챙겨가 오후 끝무렵에 공항으로 바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한참 여유 부리며 앉아 있었데 다른 동료가 와서는 오후부터 교통체증이 시작되니 어서 출발하라고 부추겼다. 여기서 늦게 출발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항에 가서 몇 시간 더 기다리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할 거라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바로 택시를 부르고 급하게 짐을 챙기고 나왔다. 하필 예상보다 택시는 빨리 도착했고, 그 바람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급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회의에 들어가 있던 로즈에게 미처 인사를 못하고 떠난 것이다.


기억을 되짚느라 버벅거리는 사이에, 그녀는 "너 그날 나랑 만난 건 기억나는 거지? 네가 우리 사무실에 온 날이잖아."라며 연타를 날렸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했다.

"당연히 기억나지. 미안해, 그 날 비행기 때문에 그렇게 가버렸네."

그리고 급하게 수습을 했다. 그걸 마음에 담아두었었다니... 하긴 나도 공항 가서라도 문자 하나 남겨둘걸.

"너가 회의 중이라 방해할 수 없었어. 그래도 나중에라도 내가 연락했어야 하는데... 서운했지?"

얼떨떨했지만, 무려 1년이 지난 후 난 그 날의 상황을 해명하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동료들에게 내가 급히 나갔다고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닌데, 로즈에게도 크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속으로 섭섭한 응어리가 남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로즈와 나의 관계는 딱 1년 전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로즈와 보낸 한나절은 나에겐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온라인으로 몇 달에 걸쳐 같이 일을 하다가 직접 만나니 정말 반가웠더랬다. 돌이켜보면 사무실에서 로즈가 커피도 갖다 주고, 자기 옆자리도 맡아주며 살뜰히 챙겨주었는데.. 좋은 추억만 가져간 나와는 달리 그녀에겐 그날이 서운한 기억이었나 보다. 그래서 나와 마주하자 그 말부터 나온 거겠지.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도 솔직하게 이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로즈를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으니 다시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느슨한 만큼, 영영 이렇게 멈춰버린 관계가 남았을 수도 있다. 아마도 나란 사람은 로즈의 친절만 받아 챙기고 인사도 안 하고 떠나버린, 무례한 인간으로 쭉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다행이다. 로즈의 솔직한 발언으로 나는 해명할 수 있었고, 그녀는 괜찮다며 쿨하게 받아주었다. 로즈의 맘도 아마 편해졌겠지.


Photo @ Polina Kovaleva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게는 언제부턴가 멈춰버린 관계들이 꽤 있다. 실패한 우정들을 하나씩 되새기기는 싫지만. 이젠 잘 떠오르지도 않는 어느 순간을 마지막으로 다신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계기는 다 다르다. 나를 서운하게 한 날카로운 말투, 부정적인 말이나 무례한 행동. 이렇게 다신 안 볼 줄 알았으면 내 마음이라도 덜 쓰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해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한참을 내 감정만 소모했다. 그러다 내가 옳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상대방은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꼬리표를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도 참 미숙한 시절이었다. 나도 내 입장만 생각했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대처했었다. 게다가 나는 로즈처럼 솔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서운하고 힘들었으면, 겉으로 끄집어내서 한 번은 물어봐볼걸.

혹시 실수는 아니었는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무슨 뜻이었는디. 속시원하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도 미련이 남는 관계들이 답답하다. 내가 더 솔직했다면, 그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반대로 나를 떠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땐 어린 마음에 무작정 내 탓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왜 싫은 건지 짐작해보려 애썼다.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내 억울함을 토로하기고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실은 좋은 사람이니 오해를 풀어 달라고. 그런데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당연히 내 마음같지 않는데 그게 참 답답하고 속상했더랬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역시 별 일 아니다... 그리고 이젠 잘 안다. 나도 늘 옳은 편에 서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좋은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누가 싫어할만한, 모진 인물도 되지 못한다. 떠나간 사람에겐 그 사람만의 문제도 있으려니 하면 되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요즘도 난 때때로 서운하다. 아마 작정하고 상처를 주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람이기에 가끔은 말실수를 하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바쁘다보니 가끔은 예의를 잊기도 하고, 불쑥 한참 늦은 안부 인사를 건내기도 한다. 하지만 본심은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하루에도 몇번씩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 고마울 일을 하고 다닌다. 그래, 이렇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거겠지.


앞으론 관계가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현재 진행 형인 관계들이 소중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긴다면, 나도 솔직하게 표현할 준비가 됐다.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서운했음을 담백하게 밝히고 그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줄 수 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내게 상처를 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닐 테니 나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결국 거기까지겠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과의 관계에 내 나름의 노력을 쏟고나면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다. 아예 안 남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덜 남겠지?




결론은 1년 전 일을 문득 꺼낸 로즈에게 고맙다는 것이다. 로즈가 그 일로 얼마나 서운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얘기했는지 그녀의 마음은 절대 알 수 없지만... 내 나름의 해석에 비추어 볼때, 나를 영 아닌 사람으로만 생각했다면, 내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날 믿어준 로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세상만사 복잡한 와중에 쉽게 내 옆의 사람을 포기하지 말자. 내 인연들을 믿어주고 감사하자고, 이렇게 또 하나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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