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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Dec 10. 2020

제발 절 불합격시켜주세요

면접장에서 내 우유부단함의 바닥을 보았다

꽤 괜찮은 포지션의 구인 공고가 떴다. 코로나의 여파로 취업 시장의 상황이 아직 좋지 않은 날들이다. 그러던 중에 이런 공고가 떴으니 어서 지원해야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업무 내용을 잘 읽어보니... 영 아니었다. 그 분야도 주제도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하던 일과도 달랐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살펴보니 내 프로필과 잘 맞았다. 나는 그쪽에서 찾는 스킬 셋과 경력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아쉬울 수도 있고, 이 정도면 괜찮은 자리지, 아니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도 한참을 고민했다. 

'해보자. 해봐서 손해 볼 것 없잖아.'

'글쎄, 그렇게 내 마음이 동하진 않는데...'

'하지만 내가 원하는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떡해.. 이거라도 해봐야지'


이런 생각을 반복하며 며칠을 보냈다. 다른 일을 하며 이 포지션을 준비하는 것을 최대한 미뤘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일이 돼서야 지원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력서는 비슷비슷하지만, 자소서와 지원동기를 잘 풀어내야 하는데... 그 포지션을 잘 이해하고, 새로 쓸만한 시간은 없었다. 결국 이전에 썼던 다른 곳에 보낸 지원서를 대충 고쳐서 제출했다. 마감일 밤에야 제출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낼 거였으면 더 노력을 기울여서 제대로 써서 낼걸.. 갑자기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몇 주 지나, (온라인)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쓴 지원서를 다시 살펴보니 심하게 부끄러웠다. 서류에서는 수많은 지원자 중 걸러내느라 대충 살펴봤겠지만, 면접관들은 이제 열심히 읽어볼텐데... 이미 보낸 걸 어떡하나 스스로 위로했다. 면접 날이 급하게 잡혀 어차피 준비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기본적 준비만 하고 면접에 들어갔는데, 막상 분위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업무에 대해 더 들어보니,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나는 사용자들 (end-user)와 직접 대면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대기업의 간부들과 밀접하게 일하고, 그들 사이에서 참여 디자인을 유도해야 했다. 처음 생각대로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과 동 떨어져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내 성격과도 잘 맞지 않을 것 같았고, 내가 수직적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능력과는 별개로 내 성격 상 그 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면접 중에는 최대한 어필했다. 난 잘할 수 있다고, 날 뽑아달라고 내 스스로도 확신 없는 말을 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원하는 모습을 꾸며내는 내 모습이 싫으면서도 노력했다... 그럭저럭 면접을 보고는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2차이자 최종인 면접에 초대되었다. 

사진 출처 @ Energe Piccom


2차 면접에는 과제가 주어졌다. 주어진 기간은 사흘이었고, 면접에서 15분 정도 발표를 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정말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닌데 공들여 준비를 해야하나...'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준비를 했다. 억지로 하려니 더 하기 싫었다. 


준비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만약 내가 최종적으로 이 곳에 합격한다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할 것인가?'


아니었다. 난 아니라는 걸 정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최종 면접까지 왔는 걸.. 여기서 이 기회를 놓치면 아쉬울 수 있어. 끝까지 해보자.'


이런 생각을 끝없이 반복하며 사흘을 보냈다. 처음 이틀은 아주 생산성 없는 시간을 보냈다.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딴짓을 하며, 다른 일을 하지도 않고. 그렇게 내 일상도 잠시 멈췄다.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걱정이 되어 밤에 잠도 잘 못 잤다. 내일 또 준비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그렇게 면접 전날까지도 생각을 거듭했다. 

이런 날 잘 아는 남자친구가 '그렇게 너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 넌 안 맞는다고 해. 그렇게 해도 돼'라고 조언해주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전날 저녁에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준비하다 보니 또 시간의 여유가 없어 허덕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며 보낸 사흘.. 사진출처 @ Energe Piccom


'이렇게 할 거면 미리 준비 좀 할걸.. 결국 잘하기엔 글렀어.'

'하지만 난 잘하고 싶지도 않은걸... 나도 마음에 안 드는 곳이야.'

'이미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을 벌써 해, 일단 면접 보고 생각해.'


이런 생각들을 반복하며, 피곤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이젠 난 왜 이러고 사는가하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최종면접에 갔다. 


면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다. 준비를 많이 못해 긴장할 줄 알았는데,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갑자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될 대로 돼라 싶은 심정으로 내가 가진 의문점들을 솔직히 물어봤다. 마음이 후련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면접이 끝났다. 


사진 출처 @ Vie Studio


아쉽지만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후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나왔다. 상투적인 내용의 불합격 안내였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 뜬금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잘 안됐는데, 이 안도감은 뭐지?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다. 제발 날 거절해주기를. 그쪽에서 날 불합격 처리해주면 난 이 기회를 놓친게 아니니까. 지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남을 미련, 그에 대한 책임감을 버려도 되니까.


그렇게 난 내 우유부단함의 바닥을 보았다. 그렇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는데 난 그럴 깜냥이 없었다. 

'나도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여기 말고 날 받아주는 데가 없으면 어떡하지? 여기만큼 좋은데도 별로 없는데? 혹시 나중에라도 내가 아쉬워하면 어떡하지?' 이런 심정으로. 이 상황에 질질 끌려왔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으며,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고, 과제를 하며... 속으론 제발 이 생각의 굴레를 상대방이 끊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얼마나 게으른 생각인가! 나 스스로 고민을 충실히 하지 못해서, 그에 대한 결정에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나는 그 결정의 순간을 최대한 피했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 삶과 내 미래에 대한 계획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결정권을 상대에게 주었다. 내가 맘에 들지도 않는 상대에게 말이다. 

Yes든 No든 최종 결정은 나의 몫이다. 사진 @  CottonBro


만약 최종면접에서 합격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거절할 수 있었을까? 만약 거절한다면, 이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었을까? 잘 안됬기에 망정이지, 이렇게 가정하는 것부터가 벌써 나에겐 과부하를 불러온다. 


더 간절한 시기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더 안정적인 자리를 빨리 찾고 싶을 수도 있고, 연봉을 더 많이 준다면 내가 하던 일과 달라도 기쁘게 수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으니. 현재 내가 내리는 결정에 책임은 내가 진다. 내 삶에 있어 최종 책임 결정권자는 나다. 잘 안된다해도 책임은 나의 몫이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자리다. 혹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되지 않더라도, 그때 가서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그것도 나의 책임으로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 일이 잘 풀린다면 내가 제일 행복하다. 누가 뭐래도 나의 성취감과 기쁨은 온전히 내가 누린다. 그러니 이 엄청난 책임과 그에 따르는 힘을 나에게만 허락해야 한다. 


몇주간 이 면접을 준비하며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 얻어간다. 난 이런 상황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과 흔들림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며, 내 삶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진 출처 @ Vicky T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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