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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Jan 27. 2021

비행기 옆자리 그 사람

글쓰는 일상 (1) 열 시간 넘게 써 내려간 건 무슨 글이었을까.

재작년 네덜란드로 올 때 독일에서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었다. 인천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비행기였다. 첫 번째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열두 시간에 달하는 긴 비행이었다. 내 옆자리 창가 쪽에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는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의 한국 남자분이 앉아 있었다. 별생각 없이 가방을 짐칸에 넣고 자리에 앉고 이륙을 기다렸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지루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대낮에 출발했기에 아직 잠이 올만한 시간이 아니었고, 비행기 내부도 환했다. 잠은 더 어두워지면 자야겠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헤드폰을 꼈다. 그리고 휴대폰에 있는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 기내식을 받을 때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서야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른 승객들은 대부분 기내 영화를 시청하거나 노트북 또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그분은 아니었다. 


@Shamia Casiano

그분은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공책에 끊임없이 뭔가를 휘갈겨 쓰는 중이었다. 이코노미 석의 비좁은 공간에 맞추어 잔뜩 웅크린 자세로. 너무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자꾸 눈길이 갔다. 대체 뭘 쓰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들던 차에 기내식이 도착했다. 우리 좌석이 식사를 받을 순서가 되었는데도 그분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승무원이 기내식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물어왔는데 그분은 듣지 못했다. 내가 살짝 부르자 당황하며 분주하게 공책을 집어넣고 테이블 위를 치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은 영어를 잘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대충 통역을 해주었다. A랑 B 중에 선택하래요, 음료수는 C, D, E가 있대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트레이를 수거해가자 그분은 바로 공책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흘긋 곁눈질을 해보았는데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일기 같기도 하고 업무 내용 같기도 하고... 하지만 더는 쳐다보지 않았다. 궁금하긴 하지만 난 그 정도로 뻔뻔하지 못하다.


내가 한참 자고 일어난 후에도 그분은 같은 모습이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는 중에, 그분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비행기 도착 시간이 언제예요? 지연된 건가요? 그분은 가방에서 손수 여행 일정을 꺼내 보여주었다. 클리어 파일에 끼워져 있던 에이포 용지가 빳빳했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도착 시간이 한참 지나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일정에 있는 도착 시간은 유럽 시간 기준이었다. 그분의 손목시계 시간은 아직 한국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나는 독일과 시차를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도착하려면 아직 몇 시간 정도 남았는지도 다시 알려드렸다. 그분은 거듭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휴대폰 시계를 꺼내어 보고, 비행 일정도 몇 번을 다시 들여다 보고는 알겠다고 했다. 납득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행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데에 안심하는 듯했다.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 사람 옆에서 내 상상력은 여기저기로 뻗어 갔다. 이 사람, 아마 해외여행을 처음 나선 것은 아닐까. 시차가 비슷한 한국 근처 나라에만 갔었는지도 모른다. 인쇄된 여행 일정에 나와있는 최종 목적지는 폴란드였다. 그렇다면 첫 해외여행으로 폴란드? 흔한 여행지는 아닌데... 폴란드엔 무슨 일로 가는 걸까... 영어를 잘 못하던데 현지에서는 어떻게 다니려나. 무엇보다도 환승은 잘하려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커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다고 미리 주의를 주는 건 괜한 오지랖이겠지... 그중에 제일 궁금한 건 역시나, 대체 뭘 쓰고 있는 걸까. 이 사람, 혹시 아주 유명한 작가인 건 아닐까.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폴란드라는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길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폴란드에서 열리는 책 관련 행사에 초청되었다거나...

한참 작업을 하던 중에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나. 갑자기 번뜩이는 글감이 떠올라 급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마감일을 맞추려 바삐 글을 써내야 하는 걸까. 그러는 새에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고 내 상상도 거기서 끝났다. 나도 내 갈 길을 가느라 다른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분이 비행기를 잘 갈아탈지, 폴란드까지 무사히 갈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 사람을 다시 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전혀 모른다. 하지만 무려 이년 전에 비행기 옆자리에 탔을 뿐인 그 사람을 이렇게 열심히 묘사한 이유가 있다. 한참 지난 후에 그 순간이 선명히 떠오르는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마음 한편에서 비켜나질 않았다. 


@Oleg Magni

보통 이런 날들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이다. 하지만 말로는 하기 힘들다. 상대방 때문일 때도 있고, 나 때문 일 때도 있다. 딱히 말할 대상이 없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글로나마 표현해본다. 종이에든 컴퓨터든 아무렇게나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좀 풀린다. 물론, 주제도 내용도 없다. 그저 아무 말 대잔치다. 다시 읽고 싶지도 않을 만큼, 감정을 토해내듯 쓴다. 그래도 그렇게 쓰고 나면 알게 모르게 위로가 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그때 그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어두컴컴한 비행기 속, 작은 불빛 아래에서 끊임없이 글을 써 내려가던 그 사람이 자꾸 떠오른다. 열 시간 넘게 써 내려가도 부족할 만큼 할 말이 많았던 걸까. 그런 건 어떤 기분일까. 


다시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아마, 그 사람은 10년 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홧김에 여행길에 올랐을 것 같다.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다가 관광객들로 가득 찬 유명한 관광지는 피해 가는 중에 체류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폴란드로 결정했다. 폴란드 여행 이후엔 뭘 해 먹고살지 아직 감이 안 오지만 훌쩍 떠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출발한 비행기 안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는 생각에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속이 후련하면서도 뭔가 답답하고, 열려 있는 앞날을 기대하면서도 걱정이 된다. 그래서 그 심정을 글로 써 내려가다 보니 써도 써도 끝이 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글쓰기에 열중하다 보니 벌써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단다. 



그렇다, 요즘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해석이다. 알게 모르게 난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는지, 마음이 불행한 날이면 홀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런 성향이 있긴 있었지만, 글쓰기를 최후의 수단처럼 여기며 마구잡이로 써 내려간 적은 전에 없었다. 


사실 그 사람은 처음 오른 외국행 비행기에서 매우 행복하고 들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 내 마음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맘대로 생각해버린 걸 수도... 다음에 혹시라도 비행기에서 또 마주친다면 그땐 꼭 물어보고 싶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냐고. 그 날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분도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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