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초단편 01.
어디로 모실까요?
꺼어억~ 영도 청학동!
한껏 취기가 오른 주연은 자신의 구형 소나타 조수석에 머리와 다리를 갈 지자로 겨우 구겨 넣었다.
택시나 대리나 같은 값이면 편하게 오고 가는 게 나을 듯하여 술자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차를 몰고 온 터였다. 보슬비가 간간히 흩뿌리는 한적한 영도대교를 미끄러지듯 지나며 주연은 차창을 살짝 내렸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진한 갯내음과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시원했다. 최근 만년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데다 외동인 아들 녀석까지 떡하니 지방 국립대를 합격한 상태라 이보다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연말이기도 하고 은근 자랑도 할 겸 해서 어느덧 오십 줄에 접어든 대학 동기들과 오랜만에 가진 만남이었다. 즐거운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시다 보니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윤희
용두산공원 뱡향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에 유독 붉은 네온사인으로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주점이었다. 기와를 얹어 주변의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포느낌, 첫사랑 같은 수수한 이름이 왠지 모르게 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부는 겨우 윤곽만 알아볼 정도로 어두웠고 세 개의 테이블마다 촛불이 타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촛불 감성이라니 주연은 더욱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먹고는 시끌벅적한 게 싫어 그나마 조용한 주점을 찾아 배회하던 중이었다.
평소에도 술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폭탄주를 즐겨 마시던 주연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기분 탓인지 술이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인심 쓰듯 계산을 마치고 친구들을 모두 배웅한 주연은 주점 한편에 앉아 뿌옇게 보이는 휴대폰 액정과 연신 시름 중이었다.
'7... 0... 5..0.2.0.8.'
풀린 눈만큼이나 초점이 맞지 않는 손가락에 겨우 힘을 줘가며 숫자를 꾹꾹 눌렀다. 윤희주점 주인이 알려준 대리운전 번호였다.
대리? 여기!
입구에 달린 풍경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낯선 남자 한 명이 윤희주점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사내였다. 주연은 살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술기운에 몸을 눕다시피 반쯤 걸치고 있던 의자를 짚고 일어섰다.
보통의 대리 기사답지 않게 살가운 말 한마디가 없다. 무표정하고 파리한 얼굴에 주연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나가 버렸다. 주연도 휘청거리며 서둘러 뒤따라 나갔다. 심야 택시를 잡지 못해 손발을 비비고 섰는 연인들을 뒤로하며 주연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롤러코스터 같은 가파른 산복도로를 거침없이 올라가자 저 멀리 불이 환하게 켜진 부산항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제일의 무역항답게 해안선을 따라 접안한 배들과 골리앗 크레인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그 웅장함을 더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평지가 거의 없는 도로와 난잡하게 들어찬 불규칙적인 건물들이 답답하지만 조금만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면 부산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영도에서 몇 십 년째 살고 있는 주연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산책로 바로 아래 미로같이 펼쳐진 집들 사이로 익숙한 주연의 집이 보였다. 소방도로를 주차장 삼아 오른쪽 도로 한편으로 차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아저씨, 저기 화단옆에 대 주이소!"
검은 정장의 사내는 주차를 하고도 한동안 말없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주연은 코트 안주머니를 더듬으며 지갑을 찾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더듬어도 지갑의 부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응? 어디 갔지? 호주머니에 있나?'
양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주점에서 계산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이를 어쩐다...'
갑자기 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당혹감으로 온몸을 뒤적이던 주연은 지갑 찾는 것을 이내 포기하고 사내를 흘깃 쳐다보았다. 사내는 처음 대면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주연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집이 바로 근처니 잠시만 기다려 주소. 아니면 계좌이체 해줄 테니 거 번호라도 불러 주면..."
주연의 말에 여태 한마디 대거리도 않던 남자가 갑자기 살기 띤 눈빛으로 한쪽 입고리를 올리며 씩 하고 웃었다.
"대가는 조만간 받으러 올 테니 기다리시오."
주연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운전석에서 내려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진 주연은 술주정처럼 혼잣말을 내뱉으며 차에서 내렸다.
"저 인간이 뭐라 하노? 와 그냥 가노? 거참, 별 희한한 인간 다 보겠네."
주연은 등골이 왠지 서늘했다. 남자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액땜이라도 하듯 가래침을 퉤 하고 뱉고는 비틀거리며 미로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