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구본형 선생님 추모 3주년을 보내며
2013년 4월 13일, 3년전 내일은 당신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난 날입니다. 그리고 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신이 떠난 빈자리가 화산의 분화구만큼이나 컸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거리에는 동백꽃, 벚꽃, 매화꽃, 살구꽃, 산수유까지 흐드러지게 피는 봄의 향연이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전 드라마의 한 대사가 기억납니다. 잊혀졌다 생각했던 그 사람이 불현 듯 ‘기억’될 때 그 사람은 진짜로 잊혀지고 있는거라고요. 당신이 떠나고 난 후, 거의 매일 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움과 절절함, 그리고 서글픔이 온통 가슴 속에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 참 무섭습니다. 서서히 당신의 자욱이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가끔 당신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전히 당신의 빈자리가 크긴 하지만, 이제 저도 당신이란 존재없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나 봅니다. 이런 내가 밉고 싫어지지만, 이것이 시간이 주는, 인생이 주는 삶의 한 모습이려니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엔 당신의 추모미사와 행사가 있었습니다.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끝내고 무려 스무명이 넘는 인원이 당신의 집을 방문했지요. 당신이 매일 새벽을 맞던 바로 그 서재에서, 당신이 보았던 풍광을 보고, 빼곡한 책장에서 당신의 손때가 묻은 책도 꺼내 보았습니다. 책 속에 적혀있는 메모에서 당신의 생각과 손끝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파티를 열었습니다. 케익도 빠질 수 없죠. 3주년을 의미하는 3개의 초. 그렇군요. 벌써 3년이네요. 불을 붙인 후 우리 모두는 살짝 당황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지? 생일축가를 부를 수도 없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당신이 좋아했던 노래 중 하나인 ‘고래사냥’을 불렀습니다. 당신의 집에서 고래 잡으러 떠나자는 외침이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아, 지긋이 눈을 감고 따라 불렀을 당신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초촐한 파티를 마치고 우리는 당신이 자주 걷던 북한산 산책 코스를 따라 걸었습니다. 세상에나! 진달래, 벚꽃, 살구꽃, 홍매화 등 각종 봄꽃들이 산에서 무도회를 벌리고 있네요. 이런 꽃들의 화려한 춤판에 술 생각이 절로 납니다. 우리는 가지고 간 막걸리를 기울였습니다. 춘희가 안주라며 분홍빛 선명한 진달래를 내밉니다. 진달래 꽃잎을 안주 삼아 먹다보니 제 얼굴은 진달래보다 더 붉은 홍매화 같은 선홍빛 때깔을 띠네요. 오늘은 차칸양이 아니라 빨간양, 아니 붉은양, 불타는양이 됩니다.
기분이 붕 뜹니다. 평소 기분이 좋아지면 라이브를 했던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노래지만 과감히 노래 한곡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들 놀라네요. 저 소심남이 웬일인가 하면서요. 바이브레이션이 이빠이(?) 장착된 목소리로 가사도 잘 떠오르지 않는 이문세의 ‘소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미옥이가 동물원의 ‘널 사랑하겠어’로 답가를 불러주네요. ‘널 사랑하겠어, 언제까지나~’ 이어 변경연의 ‘삑사리’ 가수 춘희가 이동원의 ‘이별노래’를 ‘삑사리’없이 부릅니다. 아무래도 술이 좀 부족했나 봅니다. 그리고 잠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선이가 갑자기 자신도 한 곡 하겠다고 나섭니다. 다들 무척 놀랍니다. 그녀는 조용한 시인이거든요. 그녀의 얇지만 청아한 목소리가 북한산에 은은히 퍼집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순간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시간에, 당신이 함께한다면,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얼마나 좋을까요...
내려올 때 잠시 길을 잘못들어 나무 계단 경사로에 큰 벚꽃들이 터널을 이룬 곳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미옥이가 갑자기 드러눕더니 으아~ 소리를 질러댑니다. 너무나 아름답다고요. 저도 누웠습니다. 아... 마치 자욱한 밤, 밤하늘 별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듯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감탄이 멈추지 않습니다. 옆에서 춘희가 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렇게 멋진 순간에 살아 있다는 것이, 이런 풍광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너무나 고마워졌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나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셔서.
놀 줄도 모르는 나에게 노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같이 공부할 사람, 같이 놀 사람, 같이 평생 함께 할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살아가는 의미를 알게 하고,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란 사람을 알게 해 주셔서. 같이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정말 정말로 고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미워집니다. 정말 정말로 밉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가셔야만 했나요. 저희랑 더 많이 더 오래 놀다 가셨어야지요. 물론 압니다. 그 곳에 가서도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재밌게 놀고 있다는거. 남녀요소 가리지 않고 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바람둥이(?) 기질을 가진 당신이니까요. 그 곳에서도 제대로 실력발휘하고 계시겠죠. 그렇죠?
이제 당신을 잊으려 합니다. 아니 굳이 잊지 않으려 해도 당신을 기억하는 횟수는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줄어들 겁니다. 그게 시간이 주는 망각이란 효과이니까요. 하지만 한가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셨죠. 스승을 빛내는 자는 못난 제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잘 되어야만 스승을 빛낼 수 있는 거라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마 당신보다 더 유명해지거나 잘 나가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당신처럼 꾸준하게, 그리고 내 스스로도 전혀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몸소 가르쳐주신 구본형 스피릿(Goo’s Spirit), 평생 실천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부님...
평생.
2016년 사무치는 봄날에,
차칸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