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의 눈부신 빛을 받으며 태어난 이유는
산세비에리아(Sansevieria), 산세베리아 혹은 천년란이라고 불리우는 백합목과의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공기정화 식물의 하나로써 특별한 관리없이도 혼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새로이 아파트에 입주하거나 가게를 개업할 때 대표적으로 많이 선물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모양새는 잎 밖에 없는데, 그 잎의 형태는 대개 가늘고 긴 편으로 전체적으로는 초록색 바탕에 뱀가죽과 같은 무늬를 지니고 있으며, 표면은 빳빳한 느낌을 준다.
나의 집에서도 5년전 쯤에 산세베리아의 잎 두세개 정도를 화분에 심어 돌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별 무리없이 잘 키우고 있다. 산세베리아는 별도의 잦은 신경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싹을 틔우고 그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잎의 숫자도 현재는 꽤나 풍성하게 보일 정도로 많이 늘어난 상태이다. 하지만 한번도 이 식물의 꽃을 본 적이 없었고 또한 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냥 그 자체, 잎만 보는 관상용으로만 키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근처 이웃집에 다녀오더니 산세베리아의 꽃을 보고 왔다고 한다. 꽃은 화려하진 않지만 마치 난에서 피는 꽃처럼 대를 타고 올라가며 둥글둥글 말려진 형태로 푸르름한 빛의 꽃잎을 펼쳐 낸다고 했다. 향기 또한 은은하여 온 집안을 촉촉이 적셔놓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 꽃은 어떻게 해야 피울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집에 있는 녀석은 5년이란 시간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그 꽃을 틔우지 않고 있지 않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집에서도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꽃을 틔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사를 가기위한 준비를 하느라 한달이 넘는 기간을 물 한번 주지 않고 거의 혼자 방치된 상태로 놓아 두었었는데, 어느날 보니 기존의 잎들 사이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나와 있더란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그때 그것이 산세베리아의 꽃임을 처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집에 있는 산세베리아에게도 한번 실험을 해보아야겠다고 말했다. 당분간 물을 주지 않고 과연 꽃을 틔울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은근 말리고 싶었지만 그 마음과는 반대로 나 또한 꽃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조금 넘은 시점, 어느 밤 아내가 나를 불렀다. 과연 잎들 사이로 조그마한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의 산세베리아도 화려하진 않지만 이쁘기 그지 없는 꽃망울을 터뜨렸다. 온 집안이 그 꽃향기로 가득 찼다. 소박하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 피운 뜨거운 결실이었다. 그 꽃은 바로 산세베리아의 절박함이 만든 그것이었다.
부정적 소심은 자신에게 있어 상처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 관계 속에서 원치않게 부여된 찌들음의 절규이다. 소심은 자신만의 꽃을 틔우기 위한 의지와 각오를 막고 있는 크나큰 장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유는 소심함에 눌린 채, 사회적 관계 속에 위기를 맞거나 고통 받을 때 자신 만의 고유한 공간으로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눈부신 빛을 받으며 태어난 이유는 자신 만의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이 땅에, 이 사회에 피우기 위함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만의 수명 시계를 갖고 태어난다. 그 시간은 자신이 어떠한 노력을 한다해도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숨을 쉬고 있는 순간에도, 밥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보람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멈추지 않는다. 또한 관계 속의 어려움과 고통에 눈물 흘릴 때에도, 상처를 받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에도 역시나 쉬는 법이 없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삶은 삶일 뿐이지만, 그 삶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자신 만의 꽃을 피우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산세베리아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죽음은 삶의 완결이다. 백에서 흑으로의 완전 전이(轉移)이다. 죽음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박함이다. 그 절박함만이 나를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 소심할 수록 절박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 안에 깊이 감춰진 꽃은 산세베리아의 꽃처럼 절박함의 토양을 딛고 일어날 때만이 화려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과 비교할 때 소심한 사람들은 더욱 그 절박함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소심은 나의 꽃을 아예 처음부터 피우지 못하게 막아버릴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범하든 소심하든 누구나 다 삶 속에 고통이 있고 어려움에 봉착할 시기를 맞는다. 하지만 스스로 소심하다고 회피하는 자는 꽃을 피우기 위한 필수조건인 물과 햇빛을 버리고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고통없는 삶은 없다. 소심은 내 인생의 또 다른 고통이다. 하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현실의 고통이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나만의 꽃의 만개시기를 앞당길 수 있음을 잊지말도록 하자. 지금은 비록 모든 환경이 척박하고 암울하지만 그럴수록 나를 드러내고, 이겨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부정적 소심을 딛고 일어서는 날, 나는 이 세상에 나 만의 꽃과 향기를 자욱하게 뿌릴 수 있는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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