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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an 19. 2017

피터 드러커를 통해 바라보는
20세기 사회의 초상화

#7, 경영의 멘토가 들려주는 20세기 이야기, <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지음/이동현 옮김/한국경제신문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 11. 19 ∼ 2005. 11. 11)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써 경영학의 기초와 기틀을 마련한 경영학의 아버지.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이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시각을 가졌으며, 학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존경받는 경영학자이다. 또한 뛰어난 문필력을 이용하여 생애 1939년 발간한 <경제인의 종말>을 시작으로, 무려 40여권의 책을 집필하였으며, 대부분의 책들이 나오는 즉시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의 책은 경제, 경영의 한 부분에 치중하지 않고 사회 전반, 역사, 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아우르는 흡인력을 가지고 많은 독자들을 그의 세계로 끌어 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독서를 통해 자연적으로 쌓여진 여러 장르의 해박한 지식과 전문성은 그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가진, 다양한 관점상의 주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 그의 생애


그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아돌프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모친 캐롤라인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의학을 공부한 여성으로서,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부모의 직업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경제적 문제는 그의 어릴적 성장에 있어 별 작용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집안 형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확실히 1920년대 중엽의 빈의 기준에 비추어서 말하면, 우리집은 아주 부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0세가 되던 1919년, 그는 빈 김나지엄(Vienna Gymnasium)에 입학하였고, 1927년 졸업하였다. 졸업한 바로 그 해에 독일의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29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이적하였다. 재학중 독일의 오래된 어느 머천트 뱅크의 증권 애널리스트로 취업했는데, 이 머천트 뱅크는 나중에 미국 월 스트리트의 주식중개업자의 유럽지점이 되었다. 증권 애널리스트로서의 드러커의 일은 1929년 가을의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짧게 끝났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짜이거》(Frankfurt General Anzeiger)의 금융기자로 채용되었다.


드러커는 193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신문 편집자로서의 일 외에도 또 한 몫의 일이 더 있었는데,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법학부에 시간강사로써 적을 두고 있었다. 1931년에는 국제공법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무렵에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던 국제법 담당의 병약한 노교수 대역으로 법학부 강단에도 서게 되었다.


드러커는 1933년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의 보험회사 및 은행에 근무했다. 그리고 1934년에 우연히 베링턴 아케이드(Barrington Arcade)에서 개최된 일본회화전을 감상했는데, 그것은 그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런던에서 근무하던 중 도리스 슈미트(Doris Schmidt) 여사와 만나 1937년 초 결혼했는데, 그 후 드러커 부부는 4명의 자녀와 6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영국에서 드러커는 학문적인 일을 원했지만 단순한 학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과 실무라는 두 개의 희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영국에서는 불가능한 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용이하다고 판단하여 1937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일단(一團)의 유럽은행 및 신탁회사의 주미 이코노미스트 및 영국 신문사의 주미 경제 주필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 건너간 드러커는 1939년 뉴욕교외 브롱크스 빌에 있는 사라 로렌스 여자대학(Sara Lawrence Women College)에서 시간강사 자격으로 1주일에 하루씩 경제학과 통계학을 가르치는 것 뿐이었으나, 교수생활이 즐거워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으로부터도 강의 권유가 왔다. 또한 1940년 교육계로서의 일자리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남부 애틀란타의 에머리히대학의 학장직 제의가 왔었지만, 당시 남부는 흑인에 대한 인종해방 문제가 사회의 큰 이슈가 되어있었다. 스스로를 겁쟁이라 생각했던 드러커는 도저히 남부에서 살 수 없음을 통감하고 결득 부익이 그 요청을 거절한다.


결국 드러커는 1942년 버몬트에 있는 소규모 대학인 베닝턴대학(Bennington College)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주로 철학, 정치, 그리고 종교를 강의하는 한편 자문위원으로서 정부의 일을 맡기도 했다. 그 후 1949년까지 7년 동안 이 대학에 근무했는데, 그 동안에 자문위원으로서 주로 다룬 문제는 산업과 기업의 문제였으나, 나중에는 금융문제에서부터 조직문제와 경영방침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연구상의 관심도 이에 집중되었다.


1943년경 드러커는 이미 명성 높은 자유기고가가 되어 있었는데, 《하퍼즈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었고(1940년부터 25년 이상에 걸쳐 그 잡지에 가장 많이 기고한 사람은 드러커로서, 매년 짤막한 논문 5, 6편을 게재하였다), 또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맥킨지 상(Mckinsey Award)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는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 그리고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와 같은 잡지에도 자주 기고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5년까지 20년간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에 칼럼을 고정 기고했다. 그 무렵 드러커는 신문 이외에 집필활동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드러커가 GM으로부터 GM의 조직을 연구하기 위해 초빙된 것은 1943년이었는데, 또한 이 해에 드러커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진정한 의미의 경영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해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GM에서 경영컨설팅 활동을 시작한 뒤 여러 회사에 대한 크고 작은 컨설팅을 했고, 1951년에는 GE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했다. 그 뒤 그는 여러 나라 예를 들면, 영국, 유럽, 남미 그리고 아시아 특히 일본을 상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컨설팅 대상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기관, 그리고 비영리단체가 포함되었다.


드러커는 1950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Graduate School of Business, New Youk University)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드러커는 교수로서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산업과 기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컨설턴트로서의 일의 영역은 점차 국제적으로 넓어졌고, 그와 함께 드러커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1971년부터 2003년까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의 사회과학 및 경영학부 석좌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드러커 비영리 재단](Peter F. Drucker Foundation for Non Profit Management)의 명예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 11월 11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네 명의 자녀가 있다. 


■ 한국과의 관계


드러커는 한국동란이 끝난 후 1954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교육담당 고문 자격으로 방한해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고, 1977년에는 두 번째로 방문하여 세계중소기업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하였다. 그는 이후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란 책에서 한국인을 위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에 기록된 것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4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 필적할 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과에 내가 한몫(물론 조금이지만)을 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뉴욕대학의 대학원(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클레어몬트 대학)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뛰어난 많은 한국의 학생들을 나의 클라스에서 가르쳤습니다. 졸업 후 그들은 대부분 귀국해서 우수한 교육자가 되었고, 유능한 경영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훌륭한 정부관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나라도 나라 바깥(특히 미국으로부터)에서 얻을 수 있는 교육자원을 이렇게 현명하게 이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던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습니다."


여담으로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 도자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고 한다. 수집하고 싶어했지만 기회가 닿지않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2. 이 책을 읽고



독특한 자서전


이 책의 제목을 보면 <Adventures of A Bystander>이다. 이 책의 번역대로 한다면 <구경꾼의 모험> 정도가 될 것이고, 다른 이름으로 한다면 <방관자의 모험> 정도가 될 것이다. 영국에서는 원문 제목외에 부제로 <내 생애의 다른 사람들(Other Lives and My Times)>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제목은 <피터 드러커 자서전>이다. 하지만 웬지 아쉽다. 오히려 영국의 부제가 더 와 닿는다. 자서전이긴 하지만 전혀 자서전 같지 않은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며,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 쓴 책이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내용은 없다. 영국에서 출판된 책의 부제목인 '내 생애의 다른 사람들(Other Lives and My Times)'이라는 말에 나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내 책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구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없다. 20년에 걸쳐 나는 내가 기억하는 인물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걸으며, 대화를 나누다가 잠을 깼다.(15-16P)


대단하지 않은가? 무려 구상기간이 20년이다!! 하지만 저자인 피터 드러커 교수는 그 긴 구상기간에도 불구하고 실제 타이핑은 1년 만에 끝냈다고 한다. 자신이 쓴 책 중에 가장 쉽게 쓴 책에 속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는 책 중에 하나라고 한다. 난 어떤가? 글쎄.. 솔직히 저자에 대한 나의 경험은  <Next Society>,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읽은 기억 뿐, 그렇게 많은 글을 읽지는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직 저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백이 많은 편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이 책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적 초상화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를 통해 나는 어떤 본질과 분위기, 느낌 등을 포착해서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현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모습이나 뉴딜 정책이 집행되던 시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권리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17P)


이 책은 자서전을 빙자한, 아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빙자한 간접적 성격의 자서전이고,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근대사에 대한 이야기이며, 다양한 에피소드와 삶의 이야기들을 서술한 생활적 수필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쾌하다. 그가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살아온 시대는 1900년초부터 2000년초까지 무려 100년 가까운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우리 인류의 역사는 몇 번이고 크게 회오리쳤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 대공황,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라크사태, 인종분쟁 등등 수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접촉한(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20세기의 여러 측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며, 20세기의 의미를 체험했던 인물들이다. 그는 자신의 많이 알려진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 밍숭맹숭하게 사회상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 보다 독특한 방식을 통하여 즉, 대표적 사회적 초상들인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가 지나온 20세기를 다시 조명해보고자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럼 그는 이 책을 왜 쓰고 싶었을까?


이런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떠올랐던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재임시기였다. 나는 그 무렵 몇 년 동안에 걸쳐 벌어졌던 사건들이 아직 역사가 되기에는 너무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들이나 학생들 또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이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어서 마치 니네베(고대 아시리아의 수도)나 아슈르(북이라크의 티그리스 강 서쪽에 있던 고대 도시)처럼 멀게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7P)


그렇다. 피터 드러커는 먼저 세상을 살아간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지나온 시대에 대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던 20세기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하지만 결코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될 그 옛날 이야기들을 에피소드의 형식을 통해, 그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주섬주섬 꺼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책에 자신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집어 넣었다. Chapter의 주인공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대화, 교류하며 자신의 생각, 주장을 적당히 끼워 넣어, 무리없이 내용이 버무려지도록 조절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사회상을 알게 되고, 드러커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자신도 모르게 알게되가는 것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그는 사회의 의미와 분위기 또는 현실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 초상화'만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사람들을 읽고 나면 지난 20세기 사회를 체험한 것이라고.


"사회의 초상화는 사회를 개인들 속에 반사하기도 하고 개인들을 통해 사회를 굴절시키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념과 인간사이


피터 드러커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를 거쳤지만 전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았고, 전쟁을 통해 가까운 친척이 죽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오스트리아에서부터 나오고(그의 부모님은 미리 4개국의 여권과 비자를 준비해놓아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도피시킨다) 또한 독일에서의 아슬아슬한 탈출(독일의 유일한 보수정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에 대해 반대하는 책을 낸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담한 행동이었다)은 그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나 준비성같은 것이 출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히틀러에 자행된 무자비된 600만의 유태인 학살이라든가, 전쟁터에서 조국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청년들의 죽음 그리고 전쟁 동안 무분별하게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선량한 국민들의 안타까운 죽음까지, 인간의 목숨은 어쩌면 소중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에 따라 전혀 무가치할 수도 있다는 생각. 지금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며 인간 존중, 평등, 건강, 행복, 즐거움, 노년의 안락함을 찾아가며 살아가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지난 20세기와 같은 폭풍의 시간 속에서 생각조차 가능한 일일까?


지나간 20세기는 다양한 관념의 세계이기도 했다. 사회민주주의부터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서로 엉키고 설키며 자신들의 권력, 영역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총구를 거누고 칼을 휘둘러야만 했던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무자비한 관념의 회오리 속에 단지 이념의 차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산과 강에 피를 뿌려야만 했다. 몇 사람의 선동에 의해 무지한 수많은 사람들이 밟히고 찔리고 넘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어야만 했다. 그만큼 사상에 의해 인간의 목숨은 희생양으로만 쓰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은, 폭동은, 혁명은 뒤집힘을 의미한다. 체제의 전복은 새로운 권력을 양산한다. 이때 사람들은 광분한다. 특히 아래층에 머물던 사람들은 보다 큰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몇 사람의 선동가는 권력의 새로운 배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한다. 눈이 뒤집힌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죽음이 필요하다고 자위한다. 세뇌 당한다.


독일청년 헨슈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사랑에 빠진 한 가난한 젊은 청년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치즘이란 새로운 이념은 그의 머리를, 가슴을, 눈을 뒤집어 놓았다. 권력 쟁취를 위해 가족, 애인을 버렸던 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준비하던 피터 드러커를 찾아와 그의 연인 '엘리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모습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순수한 젊은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괴물'이 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의 모습은.... 잘못된 이념은 인간의 소중함을 파괴시킨다.



마무리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 아무도 죽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랜된 찬송가 구절처럼 "그들이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증언하길 거부한 저명한 생화학자의 죄가 아닐까?(364P)


현재 세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이자, 시장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주체는 자본을 소유한 자이다. 자본, 즉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는 신 계급사회인 것이다. 현재의 가장 큰 병폐는 부익부 빈익빈 일 것이다. 가진 자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없는 자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없는 자는 죄인이 되는 사회이다. 이런 자본주의하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별 소용이 없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상태에서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나온 것이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그의 저서 <미래의 물결>에서 조만간 자본주의의 종말이 오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시대 즉, 하이퍼 민주주의가 올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하이퍼 민주주의가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인 인류 공동의 재산은 거대함이나 부, 행복이 아니라 삶을 가능하게 하며 삶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모든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후, 공기, 자유, 민주주의, 문화, 언어, 지식 등의 모든 요소가 인류 공동의 재산으로 불려 마땅하다.


하이퍼 민주주의에서는 인류를 이끄는 것이 삶의 존엄성이 될 것이다. 이 안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이 아닌 함께하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가 올지, 오더라도 언제 오게될 지 요원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코 우리가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그냥 두고만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말한 것처럼 가장 커다란 죄는 개인만 행복하면 되고, 다른 사람은 죽든 살든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관심>일 수 있는 것이다. 무관심은 사회 속 인간관계를 끊고, 사회 공동체의 삶을 피폐화 시킨다. 개인만 생각할 때, 우리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하는 사회속에서 같은 시대를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지, 사회의 숲 속에서 혼자 양식을 쌓아놓고(다른 사람이 먹을 양식까지 몽땅 창고에 넣은 채로) 나만 배불리 살아가는 한 마리 독선적이며 교활한 여우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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