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봄에 위로의 향기를 주는 라일락에 관한 시 3편
새벽 출근, 그리고 밤 늦은 퇴근.
축처진 어깨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파트 초입에서 나를 맞이해주는 이가 있습니다.
1년 중에서 이맘 때인 4월말, 길어야 5월초까지의 딱 2주 정도만 나를 반겨주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라일락 꽃, 그리고 그 진하디 진한 향기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 향기 속에는 나를 이리 오라는 애절한 손짓이 담겨져 있습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굳이 꽃에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지 않아도 그 향기는 머리를 거쳐 온 몸으로 퍼져 갑니다.
마치 인생의 첫 한잔의 술이, 첫 담배가 온 몸에 퍼지듯, 라일락 향기 또한 사람을 취하게 만듭니다.
행복합니다.
이런 봄이라서.
라일락 꽃의 연보랏빛 설레임은 물론,
라일락 향기에까지 한껏 취할 수 있어서.
그제 밤 늦은 퇴근길에는 이 좋은 라일락 향기를 힘들어 하고 있는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어
구석에 삐죽 튀어 나와 있는 가지 하나를 몰래 꺽었습니다.
미안해. 딱 이번 한번만.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아내 또한 금새 향기에 취했습니다.
라일락 꽃 가지를 물컵에 담가 놓았습니다.
진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그 향기를 맡으며 잠이 듭니다.
자다 깨도 향기는 여전히 자욱합니다.
잠이 한층 더 맛있어 집니다. 꿀잠, 아니 향기잠입니다.
맞잡은 아내의 손의 온기에서도 그 향내가 배어 있는 듯 합니다.
행복합니다.
이런 봄이라서.
라일락 꽃의 연보랏빛 설레임과
그 향기가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워주어서.
- 정두리 -
가지마다 숨겨진
작은 향기 주머니
이름 석 자 뒤에도
묻어나는 냄새
향기로만
나무가 되려는 나무
소올솔
작은 주머니가
올을 풀어서
봄 하늘을
향긋하니 덮어 버렸다.
- 오세영 -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 도종환 -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s://kr.pinterest.com/mizrak1984/flowers-%C3%A7i%C3%A7ek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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