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길의 명암
시중 1, 2위를 다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K은행에는 지역 본부장이란 직책이 있습니다. 무려 7개의 지점을 관할하는, 정식 임원은 아니지만 준 임원급의 처우를 받는 자리가 바로 지역 본부장이라 할 수 있죠.
저희 회사와 거래하는 지역 본부장과 얼마 전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업무적으로 관련이 있긴 하지만, 이 날만큼은 약 한달 전 있었던 그의 빙모상을 챙겨 주었다는 명목의 감사 자리였죠. 한적한 식당에서 그와 단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업무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죠. 그는 작년까지 본사에 근무하다가 올해 초 지역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지원업무에서 영업으로 하는 업무가 바뀌게 된 겁니다. 그에게는 이 전보가 기회이자 위기라 할 수 있는데, 만약 본사에서 했던 것 이상으로 영업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게 된다면 그가 바라마지 않는 임원의 자리로 승진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는 허무하게 옷을 벗어야만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지역본부장의 시간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뭐랄까요,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난 1년의 성과는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전임자가 무려 3년 간 뛰어난 실적을 낸 지역에 부임한 까닭에 목표자체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죠. 잘 아시겠지만, 영업 목표는 잘 하면 잘 할수록 계속해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적이 아주 좋았던 지역에 그 후임자로 가게 되면 무지하게 고생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가 그랬습니다. 정말 정신차릴 새 없이 뛰고 또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채울 수 없었던 겁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목표의 벽이 워낙 높았던 거죠. 그는 담담히 말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년의 유예를 받았다고요. 더 이상 부연설명은 안했지만, 만약 내년도 올해와 같다면 그는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만 할 겁니다. 실적 앞에서 냉정한 것이 바로 영업조직이니까요.
주제를 바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저는 비슷한 연령대입니다. 아마 저보다 1, 2살 정도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정확한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같은 또래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생각 또한 비슷한 편이죠. 하지만 한 부분에서 확연히 달랐습니다. 바로 미래라는 주제에서였죠. 그가 지금 미래를 향해 꾸고 있는 꿈은 임원이 되는 것입니다. 임원이 되기 위해 무려 20년을 넘게 달려온 만큼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고지가 바로 코 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허무하게 등을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저 또한 제 미래와 꿈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의 미래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노는 것’이라고요. 그가 관심을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지 말이죠. 10년 전 구본형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하여, 5년 전 경제인문 프로그램 <에코라이후>의 런칭 그리고 <에코독서방>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전하자 그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다 좋은데 경제적 문제는 어떻게 하냐고요. 그래서 저의 ‘최경자(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플랜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미묘해 집니다. 그리고는 짧은 한숨 뒤 한마디를 토해냅니다.
갑작스레 그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결코 제 자랑이나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비춰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의 꿈을 조금씩 준비해 나가면 어떻겠냐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 였습니다. 왜 그럴까? 듣다 보니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길, 임원이 되면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 넓어진다고 하네요. K은행의 경우 관계사만 해도 거의 백 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업무적으로 연결된 협력업체까지 따지면 천 여개에 육박할 거고요. K은행의 임원을 하다 퇴임하게 되면, 자연스레 관계사의 임원 자리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그만두더라도 다시 협력업체의 임원 자리로 갈 수도 있고요. 그러다보니 K은행의 임원자리에 오르면 회사의 이름과 규모는 달라질지라도, 계속(물론 정년 정도겠지요..)해서 임원의 자리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은 이 도전에 ‘올인’할 수 밖에 없다고 하네요.
아, 그렇구나. 그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생각이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공감되진 않았습니다. 그가 현재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있는 지금의 길은 자신을 위한 길이라기 보다는 조직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는 돈과 권력이 어둔 밤 네온사인처럼 밝게 빛나고 있을 지언정,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관심, 사랑,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고 느끼며 온전히 얻기는 어렵습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를 지라도 멈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어야 하는데, 발 아래 스쳐 지나가는 이름모를 작은 꽃의 영롱함이 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물론 그가 임원이라고 하는 목표를 이루게 되면 분명 기쁠 겁니다. 스스로를 성공했다 생각할 거고요.
하지만 그가 우러러 보고 있는 성공의 이면에는 큰 함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난 칼럼인 ‘임원이 되면 얻는 것 그리고 놓치는 것들’에서 저는 그 함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었죠.
임원은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임원은 인생에 있어 경유지일 뿐입니다. 경유지란 거쳐 지나가도 되고, 혹은 그냥 지나쳐 가도 되는 곳을 말합니다. 자신의 가치기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유지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거는 사람들은, 결국 필연적으로 그 경유지를 떠나게 될 때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그 곳을 지나서도 아직 가야할 여정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또한 경유지에 도달하기 위해 쏟아부은 자신의 청춘, 젊음, 여유 그리고 가족, 친구들과 온전히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이 결코 돌이키지 못하는 깊은 한숨으로 날아간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안타까운 건, 그가 이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죠. 또한 어떻게 해서든 바로 앞에 보이는 고지에 올라서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고요.
그리 길지 않았던 점심식사가 끝났습니다. 그가 여유가 될 때, 제가 운영하는 <에코라이후> 까페를 둘러보고 회원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네요. 그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럴 여유조차 없다는 것을 말이죠.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도전이 빛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도전이 실패할 경우, 그의 실망감과 좌절이 너무나 클 것이며,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타격을 받을지 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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