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이란 ‘사랑과 전쟁이 교차하는 광장’이네요
명퇴 대상 통보를 받은 다음 날인 11월 16일, 아내와 저녁에 만나 맛있는 식사를 한 후, 예약되어 있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다소 난해했습니다만, 다행히 아내의 기분은 좋아 보였습니다. 솔직히 식사할 때뿐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도 이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될 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 말을 꺼내야 할텐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래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야기를 해야지요.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차 한잔 마시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올 연말까지 다니는 것으로 지금의 회사와는 이별이라고요. 웃고 있던 아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21살 대학생 아들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습니다. 정말이냐고요. 응, 사실이야. 그리곤 갑자기 모든 시간이 멈춘 듯 합니다. 휴... 숨을 한번 들이킨 후 주섬주섬 말을 이어갑니다.
“회사를 그만둔다 하더라도 돈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 안 해도 돼. 일단 퇴직금 외에 명퇴금도 있어 2년 동안은 지금 지내는 것과 똑같이 지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1년동안 쓰는 돈을 대충 계산해보니까 아들의 대학등록금만 빼면 연 3,000만 원, 월 250만 원 정도 되드라고 이 금액을 감안하면 최소 4년 이상도 별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을 거야. 여기에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ETF 투자 그리고 그동안 준비해 온 글쓰기, 책쓰기 그리고 경제관련 프로그램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경제적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저 내가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만 달라질 뿐이니까.”
말하는 도중 아내를 보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빰을 타고 흘러 내립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눈물을 훔치는 아내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눈물 흘릴 이유, 전혀 없다고요. 어차피 한번은 그만둬야만 하는 직장, 이제 막 그 순간이 우리에게 온 것 뿐이라고요. 아내가 묻습니다. 혹시 다른 직장에 재취업할 생각은 없냐고요.
덧붙여 말했습니다. 분명 재취업이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된다 할지라도 지금의 대우를 받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며, 상당히 적은 연봉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요. 게다가 제 나이가 있는 만큼 잘해야 몇 년 정도 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당장 1, 2년이 아니라 장기적 상황을 위해서라도 투자와 더불어 제가 지금까지 준비해 오던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도 아내는 재취업을 원하는 눈치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제가 이야기한 대안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능성만 있는 상태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한 것이겠죠. 다시 괜찮은 직장을 구하게 되면, 안정적 수입뿐 아니라 여러 복지혜택까지 받을 수 있을 테니 충분히 그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 거고요. 하지만 이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막 5학년에 들어선 제 나이와 능력, 성향 그리고 제가 그동안 회사에서 했던 재무관련 경력만을 가지고 현재의 직장과 유사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의 회사에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일단 아내가 원한다면 구직활동도 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실업급여를 수령하기 위해서라도 구직활동은 필수이기 때문이죠.
아무 말없이 앉아있는 아들에게 지금의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빠의 폭탄선언(?)을 들으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네요.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면, 짧게라도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주저주저 합니다. 아마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몇 분여를 더 흘러 보내더니 드디어 아들이 입을 엽니다. 그리곤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어갑니다.
“아빠.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회사 다니느라 고생 많았어. 그동안 아빠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을 위해 돈 벌어 오느라 고생 많이 했다는 건 알고 있어. 힘들었던 만큼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푹 쉬어. 아빠는 푹 쉴 자격이 충분해. 할만큼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가정경제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아빠를 대신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순간 코끝이 찡해져 왔습니다. 아직 어리고 천방지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아들에게서 이토록 대견하고 감동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키운 보람은 물론이고, 이번 회사를 짤리게 된 일까지도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내의 얼굴 또한 감동과 행복으로 가득해져 있었습니다. 삶이란 참으로 감사한 일이구나. 슬픔 뒤엔 감동이, 좌절 뒤엔 희망이 몰래 준비되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거의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 지친 몸을 침대에 누입니다. 아내는 딸과 조금 더 이야기할게 있다며 먼저 자라고 하더니 옆에 와서는 저를 꼭 안아 줍니다. 불현 듯 2년 전쯤 아내가 저에게 들려준 말이 떠올랐습니다. 부부는 전우애(戰友愛)로 사는 거라는 그 말. 그때는 말도 안된다며 강하게 부인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 그리고 각종 전투를 같이 겪으며 살아가는 전우. 그러고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사랑과 전쟁이 교차하는 광장’이라 부를 수도 있겠네요. 이 광장에 당장은 전쟁의 폭풍이 휘몰아치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잘 견뎌나가면 다시 조만간 따스한 봄 햇살을 맞이할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지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s://www.popco.net/zboard/view.php?id=samyang_talk&no=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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