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아무 일없는 일상은 사실 행복한 일 천지라 할 수 있다
나는 날카로워져 있었다. 우리집 위층에는 작곡 하는 남자가 산다. 시끄럽게 음악 작업을 해야 하는 남자와 예민하게 글 쓰는 작업을 해야 하는 여자는 이웃으로 최악의 조합이다.
나는 한 달이 넘도록 이 남자의 존재를 모른 채 밤새 온 방을 울리는 쿵쿵 소리에 잠을 못 이뤘다. 처음에는 가까운 곳에 노래방을 오픈 했나 싶어 곧 그치겠지 하고 참고 참았다. 설마 다닥다닥 붙어 사는 건물 바로 위층에서 그렇게 밤새 악기를 연주 해 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잠을 설치니 다크서클은 턱 밑까지 내려왔다. 몰린 잠 때문에 점점 정신을 놓아가던 새벽,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소리의 정체를 찾아 나섰다. 신기한 게 내 방만 나서면 소리는 방향을 알 수 없을 만큼 작아졌다. 나는 뭔가에 홀렸나 싶어 잠깐 오싹해졌다. 노래방을 찾아 새벽에 온 동네를 돌고, 혹시나 싶어 건물 꼭대기 층까지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 때마다 가장 의심이 되는 위층 현관문에 귀를 대고 한참을 집중했다.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을 누군가 목격 했다면 범죄자이거나 미친년으로 오해 했으리라. 올라가면서 들었을 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니 내려오면서 들으니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른 새벽, 실례를 무릅쓰고 위층 문을 두드렸고 나를 미치게 만들던 소리도 드디어 그쳤다.
상쾌한 아침이다. 아니 벌써 오후다. 모처럼 푹 잤다. 아침의 고요함이 새삼스럽게 행복하다.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방의 평화로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협조 속에서 만들어진 행복인지 이젠 알겠다. 위층 남자가 밤새 악기를 연주했듯이 옆집 아주머니는 밤새 세탁기를 돌릴 수도 있는데 참았고, 아랫집 꼬마는 복도에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데 소곤소곤 이야기 했고, 꼭대기 층 여자는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갈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들의 노력으로 나는 단잠을 자고 달콤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기적 같은 행복과 다행 속에 살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불만 기록부에 위층 남자의 소음을 추가 한다. 나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간단하게 기록해 둔다. 이 일을 곱씹으면서 분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일 없는 날 불만 리스트를 꺼내서 쭉 보면서 어느 날 나에게 크나큰 불만이었던 일이 오늘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알아차리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건 불만 기록부이자 동시에 다행 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걸 보고 있으면 웃을 일 없던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많은 다행의 연속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갑자기 커다란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그 동안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며 살았는지 새삼스럽게 알아차린다. 반대로 결핍이 생기기 전까지는 지금이 얼마나 평화롭고 다행스러운 상황인지 깨닫기 어렵다. 누군가와 관계가 깨지고 나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느끼거나,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하게 지내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최소한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을 보기라도 해야 내가 아무일 없이 걸어갈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조차 잊고 지낸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보였던 불만도 그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잊혀지곤 한다. 아무일 없을 때는 항상 그 존재감이 없던 일들이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행복의 시작지점은 이러한 당연한 것들을 잃어버린 상황을 기억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불만스럽거나 짜증나는 일,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길 때마다 잊지 말고 불만 기록부에 정리해 둬야 한다.
내 불만 기록부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불만들이 가득하다. 콧물이 코에 가득 차 있다. 화장 다 했는데 마스크라가 눈 아래 묻었다. 주차장에 술 먹은 남자들이 시끄럽다. 샤워기 잘못 돌려놔서 불벼락 맞았다. 신발에 껌이 붙었다. 김치 먹다가 아주 통통한 생강을 씹었다. 버스 막차시간 확인해야 하는데 휴대전화 밧데리가 떨어졌다. 택시를 탔는데 가까운 거리를 돌아간다. 기다리던 택배 온 줄 알고 문 열었는데 종교인이다. 드라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끊겼는데 광고만 10분째다. 커피 쿠폰 겨우 열잔 모았는데 기간이 지났다. 냉장고에 물이 없다…… 어느 한 순간 짜증이 몰아쳐오던 불만 사항들이 가득하다. 물론, 모두가 지금은 행복 리스트가 된 항목들이다. 오늘도 이 리스트에 있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 않고 피해 지나왔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일 없는 상황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알아차리면
온통 행복한 일 천지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큰 행복이 있는가 하면, 슬픔과 아픔이 없는 일상적인 행복도 있다. 나는 항상 크고 커다란 행복만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축하해주는 행복을 맛보고 싶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불행은 고개도 내밀지 못하도록 뭘 해도 행복한 시간이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항상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닿지 않을 높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까지는 어떤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처럼 내 행복에 무심했다. 나에게는 언제쯤 그런 행복이 찾아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행복의 완성을 이루어 한꺼번에 짠 하고 행복한 순간을 즐길 수 있길 바랬다. 그러니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행복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의 완성만을 기다렸다.
일상적인 행복은, 그런 것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솔직히 한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연한 것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전혀 기뻐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짜 행복해지려면 일상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일상적인 행복을 맛보기 시작하면 수시로 행복해 진다. 아무일 없는 상황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알아차리면 온통 행복한 일 천지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내가 숨쉴 공기가 있음에, 길을 건너다 다치지 않았음에, 리모콘이 제자리에 있음에, 평범한 저녁식사에, 동료와 다툼이 없었음에, 출근 지하철이 고장 나지 않았음에, 오늘도 무사함에 감사하며 행복해 하기에는 황당하다. 보통사람이 어떤 종교적인 힘을 빌지 않고 뜬금없이 이런 일에 감사하기는 어렵다. 리모콘을 찾지 못하거나 저녁을 굶거나 지하철이 고장 난 상황이 되어야 평화로웠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이 일들은 주로 감사함 보다는 당연한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불만 형태로 표현되곤 하니까.
이런 순간을 잘 들여다보자. 불만이 해결되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이 상황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놓치지 말고 불만 기록부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놓자. 아주 사소한 몇 가지가 해결되고 나는 그 만큼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어떤 것들은 해결되는데 오래 걸리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금새 해결이 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이런 불만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해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그 불만이 사라지는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평온해지고 잊는 것이 아니라 다행스러운 순간의 행복을 맛보고 즐기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리모콘을 찾지 못해 폭발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면 발가락만 까딱해서 리모콘을 손에 쥘 수 있는 상황에 행복해 질 수 있다.
행복하세요? 누군가 물을 때면 나는 머뭇거렸다. 행복하시냐구요? 친절하게 다시 물어오면 그때서야 예. 뭐. 그냥. 이라는 애매한 대답을 겨우 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그랬다. 어느 순간 나는 기쁘고 즐거웠다. 물론, 가끔은 슬프고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내 시간들을 들여다 보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그저 그런 상태가 가장 많았다.
행복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을
행복의 순간으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저 그런 순간을 단 한번이라도 행복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다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은, 당연한 것들로 가득한 그렇고 그런 시간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큰 행복이 행복의 완성이라면 일상적인 행복은 행복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행복은 널려있는 행복의 순간들을 누가 얼마나 차곡차곡 담아 즐기느냐의 문제다. 돈이 많아야 좋은 차를 사야 비싼 옷을 입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작은 일에 감동하고, 웃고, 따뜻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행복해 질 수 있다. 행복학 개론의 기본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을 행복한 시간으로 바꾸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당연함을 기쁨으로 여기는 내가 되고 싶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누리는 일상의 혜택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건너고 싶다. 나에게 닥칠 수도 있던 불행이 비켜갔음을 매순간 알아차리고 싶다.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고요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고 즐기고 싶다.
2012년 11월 19일
-- 강미영(변화경영연구소 2기 연구원, 『혼자놀기』『숨통트기』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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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잊고 살아 갑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잃거나 잊어 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행복 또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행복을 조건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게 되면', '~상황이 오면', '~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등 자신이 생각하는 조건이 성립되면 그때 행복을 느끼겠다는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합니다. 일상이 불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조건들이 자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왜 이럴까?', '혹시 내가 문제가 있나?', '역시 그 놈 때문이야' 등등. 이러한 일상의 불만족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군가는 '감사일기'를 쓰라고 조언합니다. 최소 하루 1가지 이상 일상에 감사하기. 이것이 감사일기의 주제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상황이 아닌, 마음을 바꿔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떠올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맛이 없는 음식을 먹게 되어도,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감사일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것이라면, '불만기록부'는 불만을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미영 작가는 불만기록부가 평범한 일상, 그저 그런 일상을 다행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고맙고 행복한 일상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다 불만을 가진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불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노력에 의해 해결된 불만도 있겠지만, 주변 상황이 바뀜으로써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되는 불만도 많죠. 그렇게 사라진 불만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불만기록부에 불만을 적어놓게 되면,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읽었을 때 그 감정들을 되살아 나게 만듭니다. 불편했던, 짜증났던, 그리고 그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들이 마구 엉켜버렸던 그러한 기억들이 머리와 가슴을 채우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입에서는 '다행이다'란 말이 고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너무나 평온하기 때문이죠. 감사할 수 있고, 더불어 지금의 불만없는 일상이 오히려 행복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강미영 작가는 불만기록부를 '다행기록부'라고도 부르는 겁니다.
불만기록부를 쓰게 되면 일상을 그저 무의미한 일상으로 보지않고, 보다 격상된 다행스러운 시간, 그래서 즐길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불만의 기억들을 토대로 일상의 행복을 보다 많이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행복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행복의 순간으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널려있는 행복의 순간들을 얼마나 차곡차곡 담아 즐기느냐의 문제라고 강미영 작가는 말합니다. 더불어 아무일 없는 상황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알아차리면 온통 행복한 일 천지라고 그녀는 강조합니다.
일상이 그저 답답하고 짜증 나시나요? 그렇다면 불만기록부를 써 보세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것을 다시 펴 보세요. 현재의 일상이 분명 달라져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일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과 관점이 조금 더 성숙해지고 성장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chulsa.kr/598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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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영남권 모임에서 차칸양이 <잘 산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본 사안일텐데요, 차칸양은 과연 어떻게 그 난제를 풀어냈을까요? 백문이 불여일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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