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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Feb 14. 2020

실연(失戀)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

#66, 실연 에너지 - 그 역발상의 힘!


실연 에너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워 보인다. 상대에게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는 열정적인 모습은 인류 역사이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는 글을 써 온 것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사랑은 무한한 에너지임과 동시에 한 인간의 변화를 이끄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실연 또한 그에 버금가는 막강한 에너지를 갖는다. 실연이란 누가 먼저 마음이 변했는가와 상관없이 뒤돌아 가는 두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그 잘잘못을 가리기엔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실은 너무 거대하다. 이성적이라 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의 배경에는 분석학자들이 말하는 본능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빙산의 일각처럼 살짝 머리만 내어놓고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좌절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자신 속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파괴적인 그림자의 존재와 그것이 일각을 다투는 폭발 직전에 있었음을….. 그래서 실연은 사람을 소위 비정상이라 부르는 상태로 몰고 간다. 사실 인간 대부분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 경계에서 묘한 자세를 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인간이란 그것을 통제하는 “상식”이란 의미를 가지며 삶의 주변에 경계가 있음을 일깨울 뿐이다.


실연의 긍정적인 부분은 낯선 감성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 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타인을 배려하는 가슴을 갖게 하는 것에 있다. 부정적인 것으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수습되는 거친 모욕감을 들 수 있다. 가끔 이것은 제 때 해결되지 못한 채 꼭꼭 숨겨져 있다가 전혀 다른 타인의 가슴에 느닷없이 비수를 겨누는 역할로 그 실체를 드러내곤 한다.


쿨하게 헤어지는 남녀, 멋있어 보이긴 하나 선수들의 눈에 그리 쿨하게 보이지만 않는 것은 그것의 속성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쿨이거나 핫이거나 우리는 그 감정에 대해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사실 실연은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적절한 대응에 따라 더 멋지고 격상된 세계로 안내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결국엔 자신에 대한 용서, 타인에 대한 아량을 갖추게 되면서 훨씬 더 성숙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거듭 날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그 괴물 같은, 통제 불가능 할 것 같은 실연이란 감정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실연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본인이 의식하건 그렇지 아니하건 부정적인 감정이 그 동력원이 된 경우가 많이 있다. 실연이 몰고 오는 감정의 이면에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잠재해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예로 분노가 있다. 그것은 열등감이나 모욕감으로도 연결된다. 범죄 심리의 이면에 돈과 여자(남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폭발적인 감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반대로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경우, 무엇보다도 새로운 변화의 기폭제로서 사용될 수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한 이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자면 그런 촉매제의 원천을 인식하며 분노를 넘어 수용의 자세를 보이는 성숙함을 보이곤 한다.


실연이란 사실은 너와 나 할 것 없이 헤어진 사람에게 모욕을 남긴다. 누가 더 그랬느니 말았느니 하는 것은 유치한 아이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성숙한 사랑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감정은 나이 듬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이다. 사랑이나 실연은 젊었을 때의 한 차례 소낙비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감정들을 수용하고 관리해 왔는가에 따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 잔잔한 에너지라면 실연은 폭발적인 에너지이다.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의 차이는 그 에너지의 사용방법에 따라 바뀐다.


실연의 귀책사유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사랑은 누가 하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사랑은 자신이 선택한 행위이다. 그대 유전자의 선택이다. 그래서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많이 더 오래 사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바보스러운 일도 아니다. 차원 높은 행위이다. 상처받았다고 그 상대에게 가지는 복수의 감정은 가여운 일이다. 실연을 경험한 누구나가 그런 악마의 속삭임을 듣지만 고통스러울수록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혜로운 이들은 자신을 위해 그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몰아서 불을 지폈다. 어리석었던 이가 성공한 이로 변신하는 숨 막히는 과정 중에는 왕왕 그런 에너지의 집중이 있다. 이들은 장벽이나 장애를 뛰어 넘어 또 다른 많은 이들을 그들의 열망에 흡수시킨 자들이다. 터닝 포인트에서 방향을 제대로 설정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성공한 그들은 그것을 후일 혁신이나 변화라 불렀다. 실연은 어쩌면 환영해야 할 대상인지도 모른다. 결국엔 감사하게 될 터이니..




인정 받고 싶다는 욕구의 이면에는 거부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존재한다. 사랑해 라는 말의 이면에 사랑 받고 싶다는 절절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 처럼…


두려워하지 말 것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그것들과의 대면이다. 솔직하게 터놓고 그들과 만나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성공이라는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미 우리 안에 축적되어 있는 조 단위의 유전자들은 기회가 없어서 잠자코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발현되는 날, 놀라지 말고 맞이할 일이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는 무기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침대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해도 의심하지 말라. 그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다.


실연의 신은 딱 죽기 직전의 고통만을 줄 뿐 숨통을 끊지 않는다. 각자에 맞게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을 선사한다. 너무 오래 누워있지 마라. 일어나서 걸어가라. 삶은 인식하는 자, 그대의 것이다. 그대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라.



                                                                      2007년  9월 3일


                                                           -- 이은남(변화경영연구소 3기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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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웠다


                                     샤를 드 푸코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는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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