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칸양 Feb 28. 2020

자아, 사랑, 전쟁..
그래도 삶은 흘러간다

루이제 린저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복잡했다. 사실 개략적인 내용도 알지 못한 채 첫 장을 열었었다. 그러자 훅~하고 다가오는 이야기들. 니나의 어린 시절. 언니와의 관계. 니나의 요청에 의한 갑작스런 만남. 그리고 집으로 전달되어 온 슈타인의 18년간에 걸친 일기들... 무려 20년에 걸친 이야기들이 시공을 뛰어 넘어 때로는 아주 느리게, 어떤 때는 정신 못차릴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이야기를 쫓아가느라 허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몰입도는 강해진다.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섞이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며 쉴새없이 독자들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씹을수록 씁쓸해지는 안타까운 로맨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스무살의 나이 차이임에도 니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버린 슈타인 박사와 그런 박사와 안타까운 밀당(?)을 하는 어린 니나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이 로맨스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씁쓸하기만 하다. 아니 아예 쓴맛이라고나 할까.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을 결심한다는. 사랑하지만 너를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다음은 슈타인이 첫 눈에 니나에게 빠지는 장면이다. 그는 일기로써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929년 9월 15.


---- 새로 여자 환자가 한 명 왔다여러 가지로 귀찮게 하는 여자다그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낯설고 거북살스럽고 그렇다고 피해갈 수도 없게 만든다그녀가 진찰 시간에 온 것은 1주 전이었다그녀는 대합실 한구석에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처음에 나는 야위고 발육이 덜된 어린 소녀인 줄로 알았다그녀는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맨 끝인 그녀 차례가 될 때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그녀가 문턱을 넘어왔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야하리라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녀는 나를 본 게 아니었다그녀의 얼굴은 석회벽처럼 창백했으며 두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그러나 의식을 잃을 듯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내가 부축해 주기 전이었다실신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음에 틀림없었다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의자에 앉았으며 그리고 구두끈을 풀었다나는 발이 굉장히 부어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내가 도와주려고 하자 그녀는 나의 손을 밀쳐내고는 양말을 발에서 확 잡아올렸다패혈증이었다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좋지 않아 보였다시간이 없었다나는 여동생 헬레네를 불렀다.


슈타인의 사랑은 어쩌면 니나에 대한 호기심, 동정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야위고 발육도 덜 된 어린 소녀와 같았던 니나. 그녀의 차가워보이는 말투와 폐쇄적인 무뚝뚝함이 그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고, 그 파문은 그의 이성과 인지력의 통제를 벗어나 무려 18년간 지속되었다.



니나에게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다


2명의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긴 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니나다. 그녀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다. 요즘 말로 4차원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만큼 자신의 삶에 솔직한 사람이 없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1900년대 초중반 임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자아찾기의 삶은 거의 독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짓말 하지 않고도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본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몸으로 보여주는 여자

자신의 절망을다른 사람으로 하여금마치 큰 재산처럼 부러워하게 만드는 여자

생을 너무나 사랑했기에생을 너무나 꽉 껴안았기에그 생이 자기를 배반했을 때 그 생을 가차없이 버릴 줄 아는 여자

가만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모험을 택해 전부를 기꺼이 잃으려고 하는 여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줄 아는 여자심지어 그 사랑까지 버릴 줄 아는 여자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내맡길 줄 아는 여자


                                                                                                   -- <작품 해설중에서 --


니나는 마치 ‘여자 조르바’처럼 보인다. 니나가 추구했던 삶도 생각도 어쩌면 조르바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 당시 독일의 전시 환경 그리고 세상이 바라는 기준들이 그녀를 온전히 살아가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녀는 절충하지 못한 채 극한으로 내달린다. 여기서 안타까움이 대두된다. 원하지만 그대로 살 수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삶의 무게인 걸까. 이런 그녀를 보며 슈타인도, 그녀의 언니도 아쉬움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부러움을 내비친다. 생각은 있지만, 그녀처럼 밀어부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에 대한 엄두 자체를 내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서글픔을 느낀 탓이다. 거듭 느끼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다. 100% 만족스러운 삶 또한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면 중간중간 많은 감탄을 하게 된다. 저자인 루이제 린저의 필력은 독자들을 끌어 들이는 힘을 갖고 있다. 문장과 행간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며,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니나의 삶에 많은 응원을 보내게 되고, 슈타인의 일기에는 한숨과 더불어 그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아쉬움을 더하게 된다. 특히나 그의 마지막 일기를 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이 적셔지게 된다. 글의 힘, 공감력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아니 저자 루이제 린저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지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거의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행적 때문이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니나는 나치의 무력에 대항하는 운동가로 등장한다. 니나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린저 또한 나치에 저항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삶은 포장된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글은 진중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었을까? 글쎄다. 책의 감동이 큰 만큼 그 아쉬움도 진할 수밖에 없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마음 속 아름다운 정원은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