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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l 01. 2020

굿바이, 마이 프렌드

17년 우리 가족과 함께 한 차를 보내며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03년 봄이었나 봅니다. 차를 샀습니다. 새 차가 아닌 중고차였지만 그래도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또 전에 타시던 분이 워낙 깨끗하게 운행하던 차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치 오랜 식구처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추억이 된 그 이름, ‘누비라2’였습니다.


이전에 타던 차는 과거 대우의 간판 모델이었던 ‘르망’이었습니다. 처삼촌으로부터 공짜로 인수받았죠. 다만 연식은 꽤 오래되어 저희가 인수받던 시점이 약 10년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리고 이 차를 5년 정도 탔을 때, 즉 차 나이로 15살이 되었을 때 당시 함께 사회인 야구를 하던 감독님이 제게 제의를 해 왔습니다. 오래된 르망 대신 자기 차를 사라고 말이죠.


당시 감독님은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도 팔고, 차도 정리해야만 했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망이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2~3년은 충분히 더 탈 수 있다 생각하고 있었죠. 아내와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을 내렸죠. 차를 받기로요. 여기에는 감독님이 얼마나 차를 잘 관리하고 운행했는지, 그리고 평소 꼼꼼하고 세심했던 그의 성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였습니다.



차를 받아 집으로 온 날, 마치 운명처럼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골목길에 주차를 하다 그만 앞차와 부딪힌 겁니다. 그 차의 범퍼는 긁힌 상처만 났지만, 제 차의 오른쪽 앞 범퍼는 살짝 찌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첫 날부터... 아무리 중고차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새 차나 다름없는데. 속상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그 앞차도 제 차(르망)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로 보상을 해줄 필요는 없었죠. 그저 액땜 잘 했다고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17년간 큰 사고없이 잘 탈 수 있었던 건. 혹시 이 해프닝을 통해 전 차가 새 차에게 좋은 기운을 넘겨준 것 아닐까요?^^


그리고 17년이 흘렀습니다. 정말 큰 사고 하나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상대방의 과실에 의한 가벼운 접촉 사고 한건 정도였죠. 게다가 더 고마웠던 건 큰 고장마저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차 연식이 10년을 넘어서게 되면 여기저기 잔고장이 나기 시작하고 더불어 카센터 가는 것이 무서워질 정도로 수리비도 많이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이 아이는 그런 면에서 제 주머니까지 걱정해 준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그제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누비라2에 있던 짐들을 새 차(역시나 중고차로 샀습니다)로 옮겼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들이 있네요. 한참 아이들 데리고 여행을 다닐 때 썼던 지도책부터 방문했던 곳의 관광지도들, 동전, 부채, 메모지, 받침대, 우산, 구 네비게이션 그리고 갖가지 악세사리들. 아, 우연히 장모님 사진이 지도책 안에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200년 초반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장모님도 모시고 갔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네요.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젊었던 장모님을 보니 더 좋네요.


짐을 다 옮긴 후 아내가 차 사진을 찍습니다. 정이 들었다고 말이죠. 저도 그러네요. 많이 고맙고요. 무려 17년 동안 우리 가족에게 여러 기억과 좋은 추억들을 남겨 주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지요. 차와 함께 한 시간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제는 폐차장에 연락했습니다. 전화하니 차를 가져갈 기사님을 보내주신다 하네요. 얼마 후 기사님이 도착했습니다. 그 분 첫 말씀이 ‘차 깨끗하게 잘 타셨네요.’였습니다. 사실 세차나 청소를 잘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으로 아꼈던 만큼 후줄근해 보이진 않았나 봅니다. 시동을 키고 드디어 타인의 손에 이끌려 차가 주차장 밖으로 나갑니다. 갑자기 울컥 하네요. 별 마음의 동요도 없었는데, 이제 마지막이라 하니, 더군다나 폐차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이제 편히 쉬렴.


저녁에 문자로 차량 말소증이 왔습니다. 휴... 아내에게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 편치 않아하던 아내가 이 사진을 보게 되면 더 마음 아파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계좌 내역을 확인하니 차량번호와 함께 45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아, 갑자기 책 이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맞아요. 그 아이는 저희 가족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네요.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은 밑둥으로 나이든 주인공의 의자가 되어주던 그 나무처럼 말이죠.


굿바이, 마이 프렌드.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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