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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l 14. 2020

딸의 도시락을 싸며

하루하루가 이번 생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전기압력밥솥에서 밥이 되는 소리가 ‘칙칙칙’하며 울리고 있습니다. 검은 콩과 현미, 귀리 그리고 약간의 백미를 넣은 잡곡밥. 어제 늦은 밤 미리 예약으로 앉혀 놓았기에 걱정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7시 반이 되면 맛있는 밥이 완성될 것입니다.


사다 놓은 대형 소세지가 있기에 동그랗게 썰어 풀어놓은 계란물에 골고루 적십니다. 그리고 식용유 두른 프라이팬에 올리자 다닥다닥 구워지는 소리가 맛있게 들리네요. 딸의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중입니다. 2주 전부터 일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매일 삼각김밥만 먹기 질린다며 도시락을 싸달라네요. 휴... 아내의 도시락 싸기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딸의 도시락이라니. 뭐 인생이 이럽니까, 전업주부도 아닌데...



며칠 전 아내가 지난 1년 10개월 정도 다니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진작부터 그만두라고 했지만, 자신을 대체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만 했죠. 사실 아내가 일을 시작한 건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제가 퇴사 후 1인 기업가를 시작하며 벌이가 시원찮자(초창기니 당연하잖아요~)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들이 군대에 가고난 후 갱년기와 우울증이 한꺼번에 겹치지 않을까를 우려한 저의 종용 때문이기도 했죠.


아내는 아파트의 CS센터에서 일했습니다. 말이 좋아 CS센터지, 사실은 입주민으로부터 하자를 접수받는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클레임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진상 고객 또한 상당히 많은 편이었죠. 손에서 일을 놓은지 무려 20년이 넘었던 아내는 무척이나 힘들어 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제가 보기엔 하자 접수가 아닌, 어쩌면 총알 받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감정노동이 심하다보니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많은 여성분들입니다. 계약직도 아닌데다 고작 알바비+α 만 받고 일할 수 있는 여성분은 나이 때문에 취직이 어려운 사람들밖에 없으니까요.


이곳에서 처음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1주일을 넘기기도 힘들다 하네요. 아내 또한 중간중간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거의 2년이란 시간을 다녔으니 대단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계의 경제적 안정을 책임지기 위한 투철한 사명의식이 아니었다면 이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제 수입이 ‘0’가 된 상태에서 아내의 수입은 큰 힘이 되었죠. 마지막 퇴근을 한 아내를 그동안 수고했다며 애정과 감사함을 담아 꼭 안아 주었습니다.


 

아내가 일을 시작한 이래 저는 전(全)업주부, 아니 반(半)업주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밥, 요리는 물론이고 설거지, 청소 그리고 일주일에 4번은 아내 도시락까지 싸야만 했죠. 밥이야 전기밥솥이 하니 별 문제가 아니었고, 요리는 간단히 할 수 있는 찌개나 김치볶음밥, 채소볶음밥, 비빔국수, 카레, 떡볶이, 오리채소볶음 등을 하면 되었지만 문제는 반찬이었습니다. 특히 아내의 도시락 반찬 만들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안되는게 어디있겠습니까. 하면 웬만큼은 되더군요. 주로 많이 했던 반찬은 어묵볶음과 감자조림이었습니다. 찾아보면 인터넷에 레시피는 다 나오니, 그것을 보고 있는 재료 찾아 뚝딱뚝딱하면 어느 정도는 다 만들어지더군요. 혹여나 맛이 없으면 천연 조미료의 힘을 살짝 빌려도 되고요.^^


아내와 딸, 셋이서 살 때는 식재료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먹는 양 자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올 3월초 군대에 갔던 아들이 제대해 돌아오자 밥, 반찬 외 다른 식재료들 또한 엄청나게 빠르게 줄어들더군요. 180cm가 넘는 장정이 한명 추가되자 역시나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덕분에 제 할 일이 더 많아졌죠. 장도 더 많이 봐야하고, 준비도 더 해야 하고요.



반업주부의 삶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네요. 물론 최근은 코로나로 인해 일이 별로 없어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이것저것 하다보면 하루가 짧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조금 하다보면 점심 차려야 하고, 또 조금 뭐 하다보면 저녁 차려야 하는, 그런 시간의 연속이죠.


가끔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50대 초반의 부부, 그리고 20대 초반의 아이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아이들은 독립할 것이고 그때부터는 점점 나이들어가는 두 부부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시간이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가족이 함께 하고, 또 온전히 서로 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손만 뻗으면 바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완전한 가족으로서의 모습.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소중한 시간 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살아 갑니다.


반업주부면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가족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닐까요. 옛말에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했습니다. 채워지는것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비워지는 것은 티가 잘 난다는 의미일 겁니다. 든자리는 든든하다 감사할 줄 알고, 난자리는 나기 전에 지금의 시간을 더 잘 즐기고 함께할 수 있도록 한다면 현재는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이번 생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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