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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n 17. 2021

인공수정을 준비하며(후편)

#85, 언젠가 만날 나의 아기에게쓰는 마음편지


☞ 인공수정을 준비하며(전편)




한의원에서 나와


추어탕을 한 그릇 먹었어. 밖은 벌써 어두컴컴하고 추웠어. 하긴 어제가 동지였어.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길다는 날. 그래 지금 어쩌면 나는 너를 만나는 길의 어둡고 추운 부분을 걷고 있는 것 같구나. 내 몸이 이런 상태인 줄 몰랐어. 봄까지만 해도 굳이 보약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만큼 좋았어. 그럼 어쩐다?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기도를 하던 것도 좀 시들해져서 늦잠을 잤지. 너를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새벽에 계속 일어나야 하나 욕심부리는 거 아닌가 몸을 사렸어. 눈에 띄게 나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했던 남편에게도 미안했어. 우리는 동지와 크리스마스를 잇는 여러 행사들을 둘이서 지나면서 조금씩 갈피를 잡아갔어. 동지의 의미를 묵상했고, 겨울의 한가운데에 오신 예수님처럼 내 삶에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묵상했어.


엄마는 절에 오래 다녔어. 절에서는 동지를 초파일처럼 명절 취급을 했어. 커다란 솥에다 쑨 팥죽도 맛나지만 특히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동지의 의미를 새기는 일이 좋았어. 동지법문을 듣고 절을 나오면 희망이 막 생겨났어. 절에 안 간지 3년 되었어. 그러나 내 마음 창고에 쟁여둔 것들이 만기가 된 예금처럼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네.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긴 날이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는 낮이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분기점이 바로 동지니까 말이야. 일 년 중에 기온이 제일 아래로 내려가는 가장 추운 날도 아직 동지 뒤에 있지만 희망은 벌써 시작된 거라고 하셨지. 가장 추운 순간에 갖는 밝음에 대한 희망이야. 중요한 것은 지구가 공전 궤도에서 밤이 짧아지는 쪽으로 틀림없이 조금씩 매일매일 움직여간 것처럼 날마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고 있다는 실증적인 증거와 실천이 필요해. 그게 무언지를 찾아서 우선해서 매일매일 확보하는 게 필요한 듯 해. 그럼 어떤 징후들이 있더라도 희망은 희망으로 실현될 테지. ‘착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몸이 약해져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온 나에게도 이런 동지의 지혜가 필요해.



엄마는 말이야,


새벽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나는 새벽에 하는 일들이 너무너무 좋단다. 일어나서 모닝 페이지를 하고 절을 하고 글을 쓰는 일정 말이야. 그건 나에게는 에너지를 쓰는 일이 아니라 에너지 탱크에 접속하는 일이야. 그러니 몸이 안 좋아서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면 새벽 일정은 지키고 낮에 쉬고 운동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려면 새벽 일정을 포기해야 하나 한동안 심각하게 생각을 했단다. 밝음은 강점,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기반해서 만들어 가는 거니까 말이야. 엄마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계속 헌신하고 싶어 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단다. 그럼 나는 너무 행복해지지. 게다가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제 이틀 뒤면 겨울방학이야. 이틀만 더 무리를 하고 방학이 되면, 낮의 일이 없어지니 좀 편안히 쉬자 싶어. 그러니 내가 방학 때 낮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쉬더라도 새벽에는 기쁨을 주는 일정을 지켜 가는 게 내가 찾아낸 지혜란다. 나는 스스로를 기쁘게, 행복하게 만들면서 너를 기다릴 작정이란다.


추운 날을 보내는 지혜에 대한 또 다른 힌트는 크리스마스를 지내면서 수신한 것 같아. 아이를 양육하는 건 결혼의 목적이나 본질이 아니란 걸, 결혼은 출산과 양육 같은 공통 과제보다 훨씬 큰 개념이고, 삶은 그보다 더 큰 개념인 걸 깨달았지. 결혼하고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를 우리는 행복하게 잘 보냈어. 함께 보낸 행복한 시간, 기쁨과 미소로 추억할 수 있는 이런 에피소드들은 파워풀해서 약효가 좀 오래가는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을 많이 마음 창고에 쟁이며 살고 싶어 졌어.


이브날은 나는 출근하고 그는 야간 근무를 하고 새벽에 퇴근한 날이었어. 저녁에 퇴근해 보니 그가 만든 크리스마스 만찬이 있었어. 만찬 준비를 시킬 생각은 아니었어. 그제 출근했는데 내 직장 동료분을 만났어. 나더러 네가 찾아오면 휴직하라고 한 분이야. 늦은 나이에 임신해서 무리해서 직장 다니려다가 조산하거나 유산하지 말고 태교에 집중하고, 3년 육아휴직기간 다 쓰면서 아이 키우면 어린이집 보낼 나이가 된다고 했지. 그분이 "결혼하고서 첫 크리스마스인데 뭐 하세요? 저는 스테이크 구웠어요." 하길래 원래 그러는 건가 싶어서, 그럼 우리도 스테이크 구울까요? 나 그거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말했지.


그는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서 퇴근길에 서울역 롯데마트에서 장을 봤대. 호주산 청정육이 세일하길래 손바닥만 한 걸 사고 빕스 소스에 양송이와 양파 마늘 등의 야채를 넣어 맛을 내고, 파프리카를 통째로 프라이팬에 익혔더라. 빨간 산타 인형이 막 둥근 초콜릿 돔을 기어오르려는 케이크도 있었어. 털 달린 후드 티를 커플로 사다가 포장해 놓았어. 아빠는 이런 커플룩을 좋아하셔. 완전 섬세하지 않니? 와인도 한 병 있었어. 고기에서 육즙이라고 하는 게 나왔어. 미디엄과 웰던의 중간이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피 같아서 좀 그랬어. 내가 버리려고 잘라낸 힘줄을 그는 프라이팬에 다시 구워서 맛나게 다 먹었어. 고소하다고 하면서 말이야.


늘 이런 걸 꿈꾸었던 것 같아. 스테이크가 없어도 돼. 양말 한 짝이라도 머리맡에 놓여있길, '사랑한다. 파이팅' 이런 간단한 문구가 적힌 카드를 받길, 그리고 매일 먹던 상에 특별한 음식 단 1개만 놓였어도 식구들이 앉아서 먹는 가족 만찬 말이야. 이런 첫 단추가 꿰어져 많이 고마웠어. 나는 낮에 학교 아이들에게 너무 싼 선물을 준 것 같아, 그리고 세 아이 것은 선물을 고르고 세 아이 것은 못 골라서 길쭉한 과자로 통일한 게 마음에 걸렸어. 아빠는 철도파업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이야기했어. 먹고살기 바빠 크리스마스 챙길 틈이 없었던 부모님들 생각에 미안했어. 죄책감은 내려놓고 우리가 먼저 행복하자는 모토를 생각했어. 부모님보다 더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내려놓으려 해. 서로에게 보낸 카드를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다 세워놓았어. 후광이 나오는 것 같아.



크리스마스 날에는 


대청소를 했어. 그는 빌라 계단 거미줄을 걷고 환기를 시키고 마포질을 하고 빗자루를 부셔놓았어. 그다음 집 차례. 그가 일부를 세탁망에 넣어 세탁기를 돌려놓고, 화분을 치워가면서 청소기로 민 곳을 내가 꿇어 엎드려 싹싹 닦았어. 내가 오양 물이 나오는 걸레를 빠는 사이에 그가 밥을 차렸어. 저녁에는 같이 명동성당에 갔어. 크리스마스인데 교회에 놀러 오라는 용산 선생님의 이야기에는 '우리는 교회도 안 다니는데 뭘' 하던 사람이 명동성당에 한 번 가볼까냐는 말에는 선뜻 작전 계획을 짜더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집회가 있을 때 거기서 보낸 밤들이 있어 친숙한 거였어. 너무 추워서 성물을 파는 건물 지하의 화장실에 가서 몸을 녹이려 했단다. 


명동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서 움직였어. 꼬챙이채로 회오리로 꼬아서 튀긴 다음 시즈닝을 묻혀 주는 감자튀김 2천 원 한 개 사 먹으면서 올라갔어. 성당 본당으로 들어가는 긴 줄이 문마다 달려 있었어. 우리는 둥근 등이 열매처럼 달린 나무를 지나 성모동산에 가서 노란 초를 하나 밝혔어. 어제의 크리스마스 만찬에는 청홍초를 사 온 그가 이번에는 노랑 초를 사 왔어. 우리는 너를 만나길 손을 잡고 기도했어.


지금 그는 자고 있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왔다 갔다 했어. 찐빵 2개와 사과주스 고봉 1잔을 먹으면서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지. 남향인 이 방에 아침해가 들기 시작했어. 우리 집 베란다 정원에는 오늘 분홍색 제라늄과 노랑 꽃기린 꽃이 피었어. 나는 송이가 작은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 모두 작은 꽃 화분들이야. 동쪽부터 서쪽까지 햇볕이 비스듬히 비추어 간단다. 나는 얼른 화분들을 소파 위에다 올려놓았어. 해바라기 하라고 말이야.  


나는 지난번에 네가 했다고 내 마음에 느껴진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단다. 내가 어떤 일로도 너 때문에 골몰해서 건강을 상하거나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병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야.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면 네가 깃들기가 좋다고 했지. 나는 마음도 불편하고 몸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면서 잘 산다고 했던 거로구나 반성이 되었지. 그리고 내가 서운했던 엄마가 어떤 것이었던가 나는 찾아보았어. 나의 10대 풍광에서 말이야. 나는 화목한 부부 사이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싶어 하고, 또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도해서 잉태를 하고 싶었어.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3년간 일을 무조건 쉬고 육아휴직을 해서 네 옆에 있어주겠다고 결심했지.  기도하는 엄마가 되고, 그리고 아이들마다 결연을 맺어서 후원하는 엄마가 되길 원하고 있더구나. 그래서 그 일을 당장 시작하기로 했어. 특히 제3세계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은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모습이었어. 그걸 네가 태어난 후로 미룰 필요가 없는 거지.  


우리는 인공수정을 미루기로 결정했어. 검진일에 가서 결정을 했지. 원래는 그날 가서 인공수정 시술일을 잡을 작정이었어. 선생님은 초음파를 본 후 주사를 한 대 더 처방하려다가 우리의 결정 이야기를 듣고는 취소하셨어. 나는 뭐가 겁났는 줄 아니? 내 몸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혹시라도 유산을 경험하게 될까 봐 그게 겁이 났어. 모든 초기 유산은 자연선택의 결과란 걸 나는 알고 있지. 마음 붙이던 생명을 중간에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그냥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나는 한약을 먹으면서 쉬기로 했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한참 시간이 지났네. 잘 있어.  




                                                                              2013년 12월 31일


                                                               -- 권윤정(콩두, 변화경영연구소 8기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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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연구원은 40대에 결혼, 3년간 무려 16차에 걸친 시험관 시술을 통해 지금의 아이를 만났습니다. 


현재는 공립 특수학교 교사로 복직하여 교사로서, 한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 자신으로서의 삶을 꿋꿋하게 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꿈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박한 내 집을 가지고윤기 나게 매만져 살고 싶었어요지붕도 새지 않고방도 따스하고찬 바람도 들지 않고꽃과 나무도 심어져 있는 곳그리고 거기서 새로 갓 지은 밥된장찌개 끓여 밥상을 차려하하호호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꿈이요."


그녀의 꿈이 평생토록 그녀와 함께 하길 바랍니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 경제일기를 통한 경알못 탈출 프로젝트!(https://cafe.naver.com/moneystreamha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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