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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an 05. 2016

대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소심이들의 위대한 장점 2가지

#11 소심, 자랑해도 괜찮아!


<7:3의 법칙>을 제시하며


구체적으로 소심의 업그레이드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만 현재의 부정적 소심을 우리가 원하는 긍정적 소심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소심의 업그레이드 방법으로 <7:3의 법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7:3의 법칙>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정적 소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감을 가져라!' 하는 식의 주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그 소심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소심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소심은 꼭 부정적인 부분만이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많은 부분이 부정적 소심으로 인식되고, 그것에 사로잡혀 삶에 유해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 소심도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몇가지 예를 살펴보자.



소심한 사람들의 위대한 장점 2가지


첫 번째로 소심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영혼과 자아에 대한 무한한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부정적 소심으로 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의 소유자이다. 일반적으로 대범한 사람의 경우는 외향적이며 모든 일에 있어 매우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선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돌아보고 들여다 보지 못한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영혼과 교감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원천부터 신중하게 들여다 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삶의 목적 자체가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 명예, 권력, 돈, 체면, 우월감, 욕망 등 이러한 것들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은 단거리 경주를 반복하는 사람들과 같다. 순위에 집착하고, 승-패의 사고에 쉽게 물든다. 그 때문에 승리 뒤에 따라오는 허탈감이 무엇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 허탈감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단거리 경주에 몰입한다. 삶이 곧 승부가 된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들은 사회적 기준이나 대범한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때론 고통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둘 수 있다. 나는 왜 이럴까. 무엇이 문제인걸까. 보다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의 성공적 기준점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일까.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자신의 자아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사회적 기준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강력한 모티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되려 노력하는 영적인 존재다


영성심리학자이자 <Becoming a Practical Mystic : Creating Purpose for Our Spiritual Future>의 저자기도 한 재클린 스몰(Jacquelyn Small)은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영적인 존재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면과 영혼은 통한다. 즉 내면을 통하지 않고 영혼을 살필 수는 없는 일이다. 항상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고 고민하는 사람은 영혼과 소통이 가능할뿐더러 결국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인간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기준이 아닌 자신의 삶, 영혼이 바라는 삶에 대한 실현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심한 사람은 배려할 줄 아는 매우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배려란 무엇인가. 이타적(利他的) 마음의 행동적 표현을 의미한다. 소심한 사람들은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아(自我)와 초자아(超自我)가 매우 강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자아는 내면 속에 숨어 있는 본래의 자신을 의미한다. 초자아란 우리의 마음 속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양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아실현의 욕구 또한 매우 강하다. 겉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면의 요구에 대해 항상 심사숙고하고 사회적 생활 속에 무언가 부족함과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도덕적, 윤리적인 엄격한 기준의 틀안에서 자신의 생각뿐 아니라 행동을 제한한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행동의 오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즉 소심한 사람들은 사회적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 자아와 초자아의 영향으로 쉽게 자신의 욕심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소위 자신보다 남을 더욱 더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부터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심에 의해 배려가 가능한 기본적 토대가 마련되어 진 것이라 보는 게 더욱 타당할 지도 모른다.


이 사회가 대범한 사람들로만 가득차 있다면?


주변의 소심한 사람들을 보자. 경망스럽게 앞에 나서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사람이 있던가. 조금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심한 사람 아니던가. 승-패의 사고방식 보다는 오히려 패-승의 사고방식으로 양보하고 묵묵히 지내는 사람이 바로 소심한 사람 아니던가. 본인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지라도 보여지는 모습 만큼은 과한 욕심도 없고, 타인과 대립을 하지 않으며, 대다수의 의견에 조용히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소심한 사람 아니던가.


소심한 사람들의 배려는 어찌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려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또한 배려의 틀 안에 넣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판단된다. 만약 이 사회에 소심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고 대범한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과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양보하고 조용히 타인의 의견을 이해하려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모든 관계는 대립과 투쟁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적극적 배려든, 소심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소극적 배려든 우리 사회에서 배려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끄러움, Shyness>의 저자 버나도 카두치 박사는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은 타는 사람들의 사회적 필요성에 대해 “사회가 제 기능을 잘하려면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조용하고 남들보다 사려 깊은 부끄럼쟁이들 역시 꼭 필요하다. 모두가 지도자나 탐험가가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군중의 일부가 된다. 부끄럼쟁이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무모한 충동에 제동을 거는, 합리적이고 조심성 있는 집단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소심한 사람의 배려는 이 사회가 돌아가는 윤활유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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