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찾기 #7
몇 년전부터 인문학(人文學)이 대세입니다. 제 아무리 경제,경영,사회과학,정치,수학 등에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인문적 소양이 없다면 무언가 부족하거나 아쉬운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로 최근의 인문학은 그 위세가 당당해 보입니다. 직장인들의 경우, 광고쟁이 박웅현씨가 쓴 『책은 도끼다』와 『여덟 단어』가 크게 히트하면서 인문학이란 학문이 조금 더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문학(人文學)이란 '사람(人)과 문화(文)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탐구하는 학문으로,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와 인생의 기간동안 수반되는 모든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의 범주에는 언어학, 문학, 역사, 법학, 철학, 고고학, 예술, 비평 등 다양한 학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학문계의 감초같은 존재라 할 수 있죠.
인문학에 대한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교육 또는 학습이라는 뜻을 가진 ‘파이데이아(Paideia)’에서 유래되었는데,이 ‘파이데이아’는 기원전5세기 중반 철학사상가이자 교수였던 소피스트(Sophist)들이 젊은이들을 도시국가에 걸맞는 시민으로 육성하기 위해 실시했던 교육과정을 일컫는다 하네요. 그리고 인문학을 영어로는 ‘Humanities’라 표기하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죠. 이 말은 기원전 55년경 고대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였던 키케로(Marcus T. Cicero, B.C.106~B.C.43)가 쓴 『웅변가에 관하여(Oratore)』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되었는데, 지금과는 의미가 전혀 다른 웅변가 양성을 위한 정규과목 혹은 프로그램을 지칭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일반 교육과정으로 출발한 인문학은 중세의 종교교육에 밀려 그 힘을 잃었다가,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며 다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즉 중세의 신(神)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에 대한 복종 또는 순종형 가치관에서, 인간본연의 정신을 회복하고 되살리자는 일종의 반항형(?)가치관으로 바뀌게 된거죠. 이로써 인문학은 비로소 인간가치에 대해 되돌아봄과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과 탐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인문학의 어원이 된 ‘후마니타스(Humanitas)’를 “젊음을 유지하고 노후를 즐기며, 번영을 강화하며, 역경의 피난처가 되거나 위안을 제공받는 학문이다. 우리가 시골에 가거나 여행하는 밤에 우리와 함께하거나, 거친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집에서와 같이 편안한 즐거움을 주게 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죠. 꽤나 인문학적이죠?^^
르네상스 시대에 꽃을 피운 인문학은 근대와 현대로 들어서며 혁명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밀려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잃어가는 인간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다시 그 자리를 굳건히 다져가는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현상과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이제는 '인간다움이 무엇이며 인간이 생을 누리는 동안 추구해야 지향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색하고 탐구하는 학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문학자로 유명한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인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인문학은 자기 정신을 유지하게 합니다. 본질적인 가치를 잊지 않게 하죠. 또한 인문학은 비판적인 학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성찰과 반성, 정신의 자기 회귀에요. 시선을 밖으로만 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흔히 인문학을 고전(古典)으로 그 범위를 좁혀 생각하고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인간의 삶 그리고 영혼까지 다루는 학문 위의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학혁명으로 인해 지구뿐 아니라 우주에서 벌어지는 현상까지 밝혀내는 시대로 들어섰지만,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저 바쁘게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역할은 그저 부품 혹은 소모품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육 또한 산업화 시대에 걸맞는 산업일꾼(?)을 찍어내는데 맞추어져 있고, 이제는 그러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다보니 인간은 그저 사는 동안 경제적 문제없이 잘 벌고, 잘 쓰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진정한 삶의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까지 된거죠.
인문학은 이러한 세태에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그런 질문을 말이죠.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또한 “과연 인간이 삶 속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아무런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해답은 바로 행복이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맞습니다. 인문학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철학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색하며,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거나 웅장한 클래식을 들으며 감동하는 이유는 한번 태어난 인생을 잘 살기 위함이며, 잘 산다는 것은 바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조차 모른 채 삶을 허비할 수 밖에 없다면,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조금 더 가까이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