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LESSON)

레슨

by 반가운


비가 주룩주룩 오다 지친 날, 영화관에 갔다.
뜬금없이 혼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는 대개가 외롭거나 지쳐있을 때가 그랬다. 폭설이 내리는 풍경에 안도하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들숨과 날숨을 세었다. 눈 덮인 풍경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런 곳에서 며칠 묵고 싶다. ‘여행과 나날’—<미야케 쇼 감독. 심은경 주연>
영화 각본가 李(심은경)는 글이 써지지 않아 여행을 떠난다. 눈으로 덮인 마을은 지도에 표시조차 없는 외진 산골이다. 그곳 여관에 묵은 李는 무료한 시간으로 여관 주인장과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며칠 간의 이야기가 전부다. 그곳에서 보지 못했던 낯선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여정이 담백하다 못해 심심하다. 눈 덮인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스크린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인생에 꼭 필요한 시간’을 눈 덮인 풍경과 바람 부는 소리만으로 충분히 말해 낸 감독이 아닐까? 싶다. ‘작품을 만들수록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미야케 감독의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소설을 읽는 이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한 여행이지 않을까.
뭔가 일상이 심심하거나 답답한 날엔 집을 나서 걷거나 가방을 챙겨 차에 오르거나 그림을 보러 가거나 어느 한 곳에 몰입한다. 나를 살리는 일탈의 시간으로 채워지고 비워지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 李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 묵었다 오려한다. 그곳에서처럼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눈에 길이 막혀 한 며칠 더 머무는 여행을 내심 꿈꾼다. 일체의 전화와 톡은 멀리 둔다. 나를 살리는 일탈을 질러본다.

며칠 후 떠나는 여행에 설렘이 인다.
눈에 묻힌 산골동네 그런 곳에 가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을 준비하여 가져가곤 했는데 이번엔 도서관에서 신간으로 내가 첫 독자가 되는 행운이 왔다. 아무의 흔적이 없는 빠닥빠닥한 새 책, 이언 매큐언의 『레슨』과 시그리드 누네즈의 『그해 봄의 불확실성』이다. 공들여 고른 책은 낯선 곳에서의 며칠을 색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안내한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내장된 『레슨』을 펼친다. ‘언제나 같은 건반에서 미끄러지는 손가락… 삶이란 그런 거’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선뜻 책을 집었다.

깊은 겨울밤 산 중의 휘몰아치는 바람이 사납게 창을 흔들어댄다. 낯선 곳으로 정적의 소리를 들으러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내공이 쌓인 시간 그 후에 고요한 평화는 천천히 내게 왔다. 권태와 불안과 공허감은 지난날의 예측 불허 삶의 레슨이 아니었을까. 늘 서툴렀으나 레슨을 받으며 뒤돌아보았고 꿈을 꾸었다. 오롯이 책으로 적막으로 평온한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충만을 경험한다. 진정으로 내가 존재하는가…. 고요의 소리를 끼적이고 싶다. 나에게 맞닥뜨리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굼뜬 행동과 깜빡이는 기억력이 자주 보일 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까 싶은 초조함이 있다. 더 깊이 고요의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 멈춤이 있다면,
일부러 낯선 시골길을 걸으러 나선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 위로 하늘이 새파랗다. 눈서리 앉은 들녘이 황량하지만 찬 공기의 시린 맛을 즐기려 한참을 걸었다. 잔도길 한가운데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자태를 뽐내는 나무를 바라보다 ‘멋있어, 애썼어, 잘 지냈구나’ 말을 건네다 두 팔로 안아주었다. 예사롭지 않은 나무의 허리둘레는 연륜의 표시처럼 내게 위안을 준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들길의 풍경에 침묵이 따라왔다.

덜 붐비는 시간에 맛집을 찾아 나섰다. 텅 빈 도로엔 가지치기한 플라타너스가 한가로이 무리를 지은 풍경이 넉넉하다. 나물과 청국장을 넣어 비빔밥을 비비고 제육볶음을 먹고 누룽지 한 꾸러미를 샀다. 돌아와 끓였더니 어릴 적 가마솥 누룽지 맛이 났다. 여행지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생각을 없앰으로 한가함을 찾아 기웃대는 여행이다. 이 맛에 길들여지면 다음엔 하루 더 하루 더 묵고 싶어지는 이유가 늘어난다. 무료하다 못해 뒹구는 며칠은, 시간을 붙잡고 싶은 며칠은, 나만 아는 나만의 며칠은 내겐 숨구멍이다.

나를 숨기기 위한 감추는 여행을 궁리한다. 노트북과 책만 있으면 나는 다 괜찮다.

*제목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LESSON』에서 빌려왔다.

이언 매큐언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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