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도 괜찮아

1. 죽여도 괜찮아

by 지방

먼저 이 글을 끝까지 이어나가기 위해 혹시라도 선전적인 제목을 보고 찾아 들어온 분들께 알려야 할 것 같다. “죽여도 괜찮아”는 실재 사람을 죽이는 것에 관한 비인륜적인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니다. “죽여도 괜찮아”는 우리가 늘 접하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재미를 더하기 위해 소재로 삼는 ‘죽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 속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영화가 발전하면서 영화 서사 속에서 사용하는 ‘죽임’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죽임의 소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그냥 소리가 아니다. 언어에는 의미가 있고, 의미를 나열하여 대상과 시간, 공간을 전달한다. 그래야만 ‘듣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행복, 사랑, 고통, 미래, 탄생, 죽음 등 여러 내용을 포함하여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 전달하려 한다. 그래야만 ‘듣는 사람’들이 집중하고 재밌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재밌게 꾸밀 수 있는 소재들은 주관적 이여야 한다. 그리고 결론이 있어야 하고, 자극적이며 내용이 강한 면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에 오랫동안 사용하고 부합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소재이다. 재미를 더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소재로 삼는 것 중 우리 삶에서 가장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의 끝이고, 인생이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며, 죽은 사람은 영원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슬픔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한 것들이 포함되어있다.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의 소재가 묻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가 있다. 자연적 순리에 따라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특별한 죽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살인”인 것이다. ‘죽음”엔 ‘죽는 것’과 ‘죽이는 것”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죽는 것’은 자연적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죽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으면 끝인 것이다. 하지만 ‘죽이는 것’ 즉 ‘살인’에는 매우 험난한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죽이고 나서도 끝이 아니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고 생각해 본다면, ’죽이는 것’은 나의 남은 모든 인생과 바꿀 수 있을 만한 적대적인 사항이 생길 때,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사람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엔 무서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인지하겠지. 그래서 그것을 숨기거나, ‘사고’로 위장하거나 아니면 정당하다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의 적’이 죽는 것을 간절히 바라며, 이야기 속에선 서슴없이 직접 죽이기까지 한다. 나를 괴롭히는, 내 가족을. 또 사회, 나의 국가 등에 해를 입히는 대상을 죽이기를 희망한다.


사실 이야기 속에선 늘 가까이에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실제 삶에선 그저 막연하게 터부시되어온 “죽음”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것들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가까이, 쉽게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도 사람들은 죽고,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죽는다. 매일 보도되는 뉴스에서도 사건, 사고로 죽는 사람들은 매일 있다. 소설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죽음’의 소재를 대놓고 빈번하게 사용하는 곳은 영화이다. 이 글의 주제가 “영화 서사 속의 죽음”에 관한 것이니 이제부터 영화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


영화가 발명된 이래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가고 있다. 초기 영화들에서 사람을 죽이려면 꽤 많은 절차가 필요했다. 죽임을 당할 대상들은 일정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의 결투 장면을 연출할 때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많은 합이 있고서야 죽임을 당할 배역이 죽는다. 서부영화 “석양의 무법자(1966)”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총잡이의 결투 장면에서도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음악과 많은 컷 편집과 클로즈업 장면들이 있고서야 총을 뽑는다.

unnamed.jpg 석양의 무법자 (1966)

오늘날 영화 이야기가 다양해 지면서 영화 편집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점점 더 짧은 시간의 컷 편집을 사용하고, 더 많은 교차 편집과 사정없이 넘나드는 영화적 시간 배열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 서사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임의 속도도 빨라졌다.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프레임과 프레임을 연결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제 영화에서 아무리 짧고 빠른 편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화 서사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관객들은 영화적 장치에 숙련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도 더 빠르게 진행되고, 죽음 자체보다도 상황 전개에 더욱 공을 들여 서사를 이어 나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선 죽음의 소재가 의미가 깊은 사연을 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든 영화가 다 그렇다고 볼 수 없지만 매해 생산된 영화 서사에서 대부분의 ‘죽음’은 하나의 ‘액션’으로 전락하였다.




이야기를 지속하려면 죽여야 한다.


한번은,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아이들 상대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만들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그 아이들이 얘기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두세 명의 아이 중 서로의 이야기들을 섞는 와중에 이야기의 리더가 자연스레 생기곤 한다. 이야기는 그 리더격인 아이를 중심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먼저 공간의 상황 설정을 먼저 한다. - 그 아이들은 바닷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인어들의 이야기이다. - 그리곤 관계 설정을 한 후 - 엄마 인어, 아빠 인어, 남자 친구 인어 등등 -, 악당을 만들어 낸다. - 옆에서 귀찮게 하는 동생이 악당이 되었다. - 그리곤 이야기의 흐름은 인어들의 세계를 혼돈에 빠지게 하는 자신의 동생 캐릭터를 죽이자고 한다. 그 캐릭터는 스파이가 되기도 하고, 괴물의 부하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 동생이 맡은 악당 캐릭터를 죽이려고 애를 쓰는데 쉽게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한 시간 이상 이어졌다.


비단, 이 경우뿐만 아니라 아이들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소재로 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아빠가 아파서 주고,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고, 외계인이 나타나서 죽기도 한다.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죽음을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야기가 지속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도 죽음으로 협박하지 않고 아름답고 화려한 고상한 이야기만을 하는 아이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어서 친구들이 인내심을 갖고 듣지 못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이야기 속엔 죽을까 봐 두렵거나, 죽여야만 한다거나, 왜 죽었는지 등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 이야기 속에서 죽음의 가치는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 재미를 위한 죽음의 소재를 너무 남용해서인가! 그 효과는 이야기 속에서 보잘것없이 전락해 버리고 과잉 죽음으로 인한 고귀한 윤리가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점점 더 ‘죽음’의 의미는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죽음’의 소재가 영화 서사에서 변해가는 지 이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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